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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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에게 사랑받은 아소카 왕


▲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연꽃을 들고 고뇌하는 아소카 왕의 모습. 아소카 왕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왕위를 지키기 위해 살인과 전쟁을 불사했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낳은 참혹한 결과를 보고 깊이 후회하며 참회하였고 마침내 자비의 군주로 거듭나게 된다.


2016년 10월 01일 (토)

 빔비사라 왕과 아자타삿투 왕 그리고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이 활동하셨을 당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포교와 수행의 중심이 되는 사원을 교단에 바치기도 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듣고 교단을 위해 큰 공덕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마지막은 아름답지 못했다.

빔비사라 왕은 아들 아자타삿투에 의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파세나디 왕 또한 왕위를 노린 아들 비두다바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초라한 죽음을 맞았다. 빔비사라 왕과 파세나디 왕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님께서도 마침내 열반을 맞으셨다.

그로부터 260여 년이 흐른 뒤, 인도에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왕이 탄생하였다. 그가 바로 ‘신들에게 사랑받는 자’라 불리며 불국토를 건설한 아소카 왕이다.


잔혹한 업보를 대물림한 아자타삿투 왕

 부처님이 활동하실 당시 인도는 정복전쟁이 한창이었고 각 나라를 다스리는 왕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책임과 의무는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중인도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 왕국은 앙가 왕국을 병합하였고 코살라 왕국 및 아완띠 왕국 그리고 왓지 연맹과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였다. 북인도의 강대국이었던 코살라 왕국은 카시 왕국을 병합하고 마가다 왕국과 혼인을 통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였다. 마가다 왕국과 코살라 왕국의 균형이 깨진 것은 빔비사라 왕과 파세나디 왕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반역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코살라 왕국의 비두다바는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 왕국을 정복하고 석가족을 멸망시켰다. 이에 분노한 마가다 왕국의 아자타삿투 왕은 비두다바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코살라 왕국을 병합하였다. 기세를 잡은 아자타삿투 왕은 아완띠 왕국까지 병합한 후 이웃의 왓지 연맹을 자신의 통치 아래 두고 훗날 통일 인도 제국의 수도가 되는 도시 파탈리푸트라를 건설하였다. 30년 넘게 마가다 왕국의 방대한 영토를 다스린 그는 실로 탁월한 정복자이자 뛰어난 통치자였다. 하지만 그 역시 끝내 자신의 업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자타삿투 왕은 말년에 아들 ‘우다이밧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 후 마가다 왕국의 왕위는 계속해서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반역과 찬탈로 이어졌다. 우다이밧다는 아들 ‘아누룻다’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아누룻다는 아들 ‘문다’에게 목숨을 잃었으며, 문다는 아들 ‘나가다사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왕위 계승은 결국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왕위를 둘러싼 혈투 끝에 신하였던 ‘시슈나가’가 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는 탐욕과 욕망이 뒤엉킨 핏자국들로 가득한 라자가하를 떠나 파탈리푸트라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무명의 소년 장수가 세운 마우리야 왕조

 마가다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시슈나가 왕조는 10명의 왕을 배출하며 360년 동안 유지되었다. 시슈나가 왕조가 막을 내린 뒤 ‘난다 왕조’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의 마가다 왕국은 2만의 기병과 20만의 보병, 3천 마리의 전투 코끼리 부대와 4마리의 말이 끄는 2천대의 전차를 보유한 엄청난 병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더욱 크게 확장하였다. 이처럼 무적의 군대를 자랑하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린 것은 내부의 균열이었다.

 난다 왕조의 마지막 왕 ‘다나’는 매우 거칠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그는 바라문 출신으로 통치술과 정치학, 국제외교, 의학, 점성술 등에 정통했던 당대의 학자 ‘까우띨리야’를 공공연하게 모욕하였다. 이에 까우띨리야는 난다 왕조 및 다나 왕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키우게 되었고 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몸을 숨긴 숲에서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이 소년이 자신의 운명을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한 까우띨리야는 그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학문과 기술을 전수하였다. 소년의 이름은 찬드라굽타였다.

 수년이 흐른 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찬드라굽타는 난다 왕조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이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그는 난다 왕의 추격을 피해 당시 알렉산더 왕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찬드라굽타는 까우띨리야에게 배운 것과는 또 다른 새로운 무기와 군사체제, 병법과 전투기술 등에 대한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다. 그 후 자신의 세력을 규합한 찬드라굽타는 마가다 왕국과 전쟁을 선언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탈리푸트라에 입성한 무명의 청년 장수 찬드라굽타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가 되었고 난다 왕조의 마지막 왕 다나에게는 추방령이 떨어졌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수레 한 대 뿐이었다. 다나는 두 아내와 딸 그리고 약간의 금은보화를 수레에 실었다. 수레를 끌고 왕궁을 떠나려는 순간, 난다 왕의 딸은 개선행진을 하는 찬드라굽타를 보고 첫 눈에 반하여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수레에서 내렸고, 찬드라굽타와 혼인을 하였다.

 찬드라굽타의 스승 까우띨리야는 새로운 왕조의 재상이 되었고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그리스인들이 점령했던 영토를 되찾아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찬드라굽타의 재위 기간 동안 마가다 왕국의 병력은 더욱 증가하여 보병 60만, 기병 3만, 전투 코끼리 9천 마리와 이들을 다루는 3만 6천의 병사들 그리고 수천 대의 전차가 왕국을 수호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찬드라굽타는 이처럼 영광스러운 왕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다. 왕이 된 지 24년째 되던 해, 아들 ‘빈두사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출가를 한 것이다. 수년 째 계속된 가뭄으로 기근이 들자 자이나교로 개종한 후 왕으로써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왕궁을 떠난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의 수행에 따라 금식을 통해 마침내 목숨까지 내려놓은 채 죽음을 맞았다. 이 또한 세계 역사상 한 제국의 군주로써 보기 드문 선택이었다.



이발사가 된 바라문의 딸

 빈두사라 왕의 재위 시절, 앙가 왕국의 수도였던 참파에 한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담마’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의 관상을 본 예언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딸은 장차 왕비가 될 것이며 두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아들 중 한 명은 천하를 통치할 것이요, 다른 한 명은 출가하여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바라문은 크게 기뻐하며 딸을 수시마 왕자와 혼인시키고자 하였다. 수시마 왕자는 장차 왕위에 오를 빈두사라 왕의 장남이었다. 그러자 예언가는 고개를 저으며 빈두사라 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바라문은 딸 담마를 곱게 단장하여 파탈리푸트라로 데리고 간 후 빈두사라 왕에게 바쳤다.

 빈두사라에게는 난다 왕의 딸을 비롯하여 15명의 왕비가 있었고 후궁들도 많았다. 빈두사라 왕의 부인이 되기 위해 입궁한 담마를 본 왕비들과 후궁들은 그녀의 뛰어난 아름다움에 질투를 느꼈다. 서로를 시기하던 여인들은 담마가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도록 계략을 꾸미는 일에 한 마음으로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담마는 왕비들과 후궁들의 강요에 의해 천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직업인 이발과 미용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의 시간도 그녀의 운명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두사라 왕의 머리 손질을 맡게 된 것이다. 빈두사라 왕은 처음 보는 아름다운 이발사에게 흥미를 느꼈고 그녀의 섬세한 솜씨에 크게 만족하여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이 순간을 고대해온 담마는 무릎을 꿇은 후 왕에게 말했다.

 “저의 소원은 한 가지 뿐 입니다. 그것은 바로 왕께서 저를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빈두사라 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담마는 아름다웠고 이발 솜씨도 뛰어났으나 그녀는 천한 이발사가 아니던가.

 “나는 왕이요, 너는 이발사다. 내가 어찌 너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빈두사라 왕이 노한 얼굴로 다그쳐 묻자 담마는 자신이 이발사가 아니라 바라문의 딸이며, 왕의 아내가 되기 위해 입궁하였으나 왕비들과 후궁들의 강요에 의해 이발과 미용기술을 배우게 되었다고 밝혔다.

담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빈두사라 왕은 그때서야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대는 이제 이발 일을 하지 않아도 좋다.”



어머니의 근심을 여의게 한 아들

 그 날 이후 담마는 빈두사라 왕의 열여섯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왕자를 낳았다. 이에 빈두사라 왕은 크게 기뻐하였고 담마 왕비를 더욱 총애하였다. 다른 왕비들과 후궁들의 견제와 질투를 받던 중 오직 빈두사라 왕의 총애 하나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 담마에게 있어 첫 번째 아들은 매우 중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는다 하여도 아들 없는 왕비의 신세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왕실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이에 담마 왕비는 빈두사라 왕이 왕자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었으면 좋겠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는 모든 근심을 여의었습니다.”

 담마 왕비의 말을 들은 빈두사라 왕은 왕자에게 ‘아소카a-shoka 근심 없음’라는 이름을 내렸다. 몇 년 후 담마 왕비는 다시 임신을 하였고 또 왕자를 낳았다. 빈두사라 왕은 이번에도 그녀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으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의 모든 슬픔이 사라졌습니다.”

 담마 왕비의 이야기에 따라 두 번째 왕자의 이름은 ‘비가따소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언가의 말처럼 훗날 담마 왕비가 낳은 아소카 왕자는 위대한 군주가 되었고 비가따소카 왕자는 출가하여 아라한 과를 성취하게 된다.



탁실라의 반란을 제압하다

 마가다 왕국의 재상 까우띨리야는 장차 군주가 될 왕자들의 교육을 더욱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발전시켰다. 왕자의 교육은 보통 7살 때 시작되었다. 이때 왕자들은 글과 산수를 배운 뒤 여러 가지 언어와 경전을 익히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농사와 장사 그리고 가축을 기르는 법에 대하여 배우는데 이는 곧 국가의 재정 및 경제운영에 대한 공부였다. 마지막으로 배우는 것은 정치였다. 철학과 법규, 전쟁 등에 대한 모든 지식을 빠짐없이 익혀야했고 무기를 다루는 법, 말과 코끼리를 타는 법을 비롯하여 병법과 전투기술, 외교와 통치술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화, 종교 등에 대한 공부였다. 아소카 왕자는 약 10년에 걸쳐 이 모든 수업을 빠짐없이 철저하게 공부하였고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오랜 기간에 걸친 수업이 끝나면 왕자들은 왕국에서 다스리는 여러 지방으로 보내졌다. 배운 것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통치와 경영에 대한 감각을 익히도록 한 것이다. 아소카 왕자는 아완띠 왕국의 수도였던 번화한 도시 웃제니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탁실라로 보내졌다. 탁실라는 빈두사라 왕의 후계자이자 아소카 왕자의 이복형인 수시마 왕자가 다스리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수시마 왕자는 탁실라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고 거센 반란과 소요가 계속되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수도로 귀환한 수시마 왕자를 대신하여 이제 갓 18살이 된 아소카 왕자가 탁실라에 가게 된 것이다. 민심이 엉망이 된 탁실라에 가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아소카 왕자가 탁실라에 도착하자 백성들은 문을 활짝 열고 그를 맞이하며 선물을 바쳤다. 백성들은 새로운 통치자로 부임한 아소카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말했다.

 “우리는 왕자님에게 조금도 나쁜 감정이 없습니다. 우리는 빈두사라 대왕에게도 나쁜 감정이 없습니다. 다만 저 부패한 관리들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에 분노했던 것입니다.”

 탁실라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관료들의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시마 왕자는 오히려 관료들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백성들의 반발을 샀던 것이다. 빈두사라 왕이 탁실라로 공정한 통치자를 보내주기를 기다린 탁실라의 백성들은 아소카 왕자가 이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며 그를 환영했던 것이다.

사정을 파악한 아소카 왕자는 백성들의 기대에 멋지게 부응하였고 탁실라의 소요를 깨끗하게 잠재웠다. 이 사건으로 아소카 왕자는 후계자였던 수시마 왕자보다 훨씬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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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기(칼럼니스트) gorah@naver.com
삽화 : 견동한


· 작가 소개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였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였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외조 - 성공한 여자를 만든 남자의 비결>가 있으며 현재 세계일보에 <꽃미남 중독>과 <외조의 기술>을 연재중이다.

 한 사람의 불자(佛子)이자 여자로써 또 꽃미남 애호가이자 전문가로써 2500여년 불교 역사에 존재해 왔던 멋진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발원 끝에 좋은 인연을 만나 조계사 홈페이지에 <경전 속 꽃미남>을 연재하게 되었다.

 <경전 속 꽃미남>은 21세기 재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를 초월하는 멋진 남성에 대한 이야기로 불자(佛子) 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긍정적이고도 즐거운 귀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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