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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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佛典) 속 명구(名句) 여행] 29. 원각경 보안보살장을 읽노라면...




 원각경 보안보살장을 읽노라면 가이없는 우주허공이 한 생각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善男子
선남자
此菩薩 及末世衆生
차보살 급말세중생
證得諸幻 滅影像故
증득제환 멸영상고
爾時 便得無方淸淨
이시 변득무방청정
無邊虛空 覺所顯發
무변허공 각소현발

선남자여
이 보살들과 말세중생들이
모든 것이 환(幻)임을 증득하여
실체없는 영상의 그림자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이때에 모서리가 없는 청정함을 얻으리라
가이없는 우주허공이
한 생각에서 나타나 일어난 것이니라.



* 幻:변할 환

 우리네 중생들은 우리 마음 한 생각에서 우주허공이 나온 것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어쩌다보니 우주 허공 속에 내가 들어있어서 울고 웃고 밥도 먹고, 밥 먹은 것을 온 몸을 거치게 한 다음에 내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전도몽상이다.

 카페에 앉아 원고지를 펼쳐놓고 원고 구상을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들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다. 이런저런 캐릭터를 논의하더니 <목소리를 잃어버린 인어공주>를 주인공으로 만든다. 천신만고 끝에 교사가 되긴 했는데 그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인어공주, 냉가슴을 앓는 벙어리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의 머릿속에는 백치 아다다도 지나가고 벙어리 삼룡이도 지나간다. 열반에 들기 직전에 목이 타는 바람에 옆에서 지키고 있는 상좌에게 물을 달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물~’하고 말하려는데 끝의 리을발음이 안 나오는 바람에 ‘무~’라고 했다는 어떤 분의 이야기도 지나간다. 그분이 그렇게 입적하고 나서 상좌 스님은 “우리 큰스님께서는 끝내 ‘무’라고 말씀하시고 입적하셨다.”고 말을 했다고 들었다.

 낄낄거리면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세 명의 남자 고등학생들, 지금 살아있는 법문을 나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인어공주는 온갖 방법을 찾아 애태우던 마녀를 찾아가게 된다. 목소리를 내주는 대신 마녀가 요구하는 조건은 잠시 보류시키고 이야기가 진행되더니 학생은 큰소리로 웃으면서 허무한 결말을 도출해내고 있다. 마녀의 처방은 비타민 한 알. 그토록 목소리를 내고 싶어 안달이었던 인어공주가 다시 학교로 가서 학생들에게 말한 한마디는 “봄 소풍가자.”란다. 듣던 내가 다 허무해진다.

 영상물로 제작되는 작품의 아이디어 회의이다. 지금 저 학생들이 주고받는 이 생각 저 생각이 화면에 영상으로 처리될 것이다. 한 생각 속에서 한 작품의 우주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의 대화를 자연스럽게 물끄러미 듣다가 ‘가이없는 허공이 한 생각 마음에 나온 것이다.’라고 부처님께서 원각경에 말씀하신 내용이 훨씬 잘 이해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온다.

 누에가 누에고치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나는 지금 누에고치에 불과한 우주허공 누에고치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누에가 실을 토해내서 누에고치를 만들 듯이 우리는 생각의 실을 토해내서 나도 만들고 우주허공도 만들어 낸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누에를 키우던 때 넉잠을 자고 나서 미친 듯이 뽕잎을 먹어치우던 누에들이 생각난다.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를 내면서 뽕잎을 갉아먹던 누에들의 합창소리가 현재로 옮겨와서 생방송을 들려주는 듯하다. 비라도 뿌릴라치면 젖어버린 뽕잎들을 한 잎 한 잎 마른 수건으로 닦아야했다. 아! 일주일동안 신나게 뽕잎을 먹고 나서 투명한 몸으로 변하던 누에들, 실은 잠사공장에 바치고 몸까지 번데기가 되어 펄펄 끓는 물속에서 헤엄을 친 뒤 봉투에 담겨져 이곳저곳으로 가곤 했다. 삶겨져서 번데기가 되는 누에들은 그렇고 가끔 성질 급한 누에들은 고치 속에서 나방이 되어 누에고치를 뚫고 탈출하기도 했다. 기껏해야 형광등까지 날아가서 퍼득거리다가 세상을 하직하곤 했지만 누에고치를 뚫고나가는 그 힘에 어린마음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었다. 우주허공누에고치는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강나라 황벽스님은 눈·귀·코·혀·몸·생각이라는 육근六根과 육근에 인식되어 들어오고 있는 육진六塵의 세계를 한꺼번에 멀리 벗어나야 한다고 갈파해주고 있다.



根塵逈脫事非常
근진형탈사비상
緊把繩頭做一場
긴파승두주일장

육근과 육진의 누에고치 속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은
일상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니
생사의 노끈을 꽉 부여잡고
한바탕 일을 치러내야 한다네.



 마라톤 선수들도 30㎞쯤 달리면 심장이 터져서 폭발해 벌릴 것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박감이 엄습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데드포인트’이다. 기록에 관계없이 풀코스를 완주해내는 선수들에게 무한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 죽을 것만 같은 순간순간들을 질끈질끈 참아 넘기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좀 긴 것 같은 마라톤도 마찬가지 일 터이다. 지금 이 찰나에 데드포인트를 통과 중인 인생마라토너도 있고 출발선에 서 있는 인생마라토너도 있고, 뛰다가 지쳐서 누운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마라토너도 있다. 평탄한 길은 재미없어서 마다하고 일부러 자갈과 가시밭이 곳곳에 있는 코스를 선택해서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선수들도 많다.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살짝 자동차로 힘든 구간을 통과하는 얌체선수도 없지 않아 있다. 어쨌거나 가지가지 색깔의 유니폼을 입고 가지가지 주법으로 각자각자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지어놓은 우주허공누에고치가 허깨비 환상임을 알아차리면 육근과 육진이 청정해진다.




善男子
선남자
根淸淨故 色塵淸淨
근청정고 색진청정
色淸淨故 聲塵淸淨
색청정고 성진청정
香味觸法 亦復如是
향미촉법 역부여시

선남자여
근이 청정해지기 때문에
색진이 청정해지고
색진이 청정해지기 때문에
성진이 청정해지고
향진·미진·촉진·법진도
이와 같이 되느니라.



 데드포인트를 통과하면 마라토너의 발걸음이 뛰고 있는 그 자체로 많이 평화로워진다. 허깨비 환상임을 꿰뚫어내기만 하면 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육근도 청정해지고 인식되어 들어오는 대상 경계인 육진도 청정해질 것은 기어 다니는 개미들도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사대(四大)인 지대·수대·풍대·화대도 청정해져서 온 몸이 뜨뜻해지면서 혈액순환도 좋아지고 호흡도 편안해져서 골격이 튼튼해진다. 이제 온 우주가 청정해진다.




善男子 彼淸淨故
선남자 피청정고
十力四無所畏 四無碍智
십력사무소외 사무애지
佛十八不共法 三十七助道品淸淨
불십팔불공법 삼십칠조도품청정
如是乃至 八萬四千陀羅尼門
여시내지 팔만사천다라니문
一切淸淨
일체청정

선남자여, 저 사대가 청정해지기
때문에 십력과 사무소외와
사무애지와 부처님의 십팔불공법과
삼십칠조도품이 청정해지며 이와같이
팔만사천다라니문까지 일체가
청정해지느니라.



 짙어져있는 녹음이 더욱 청정해진 상태로 망막에 잡히고 은행잎을 스치는 바람과 가끔씩 쏟아지는 빗줄기까지도 더욱 청정하게 느껴진다.






· 글: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 출처: 미디어조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