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왔던 국화가 죽지도 않고 조계사 마당을 찾아와 그윽한 향기를 뿜어주고 있다.
菊萬風霜而不掘發
국만풍상이불굴발
桐千年老而猶藏曲
동천년노이유장곡
국화는 만가지 풍상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워내고
오동나무는 천년을 늙어도
오히려 곡조를 간직하고 있다네
국화의 향기는 어디에 간직되었다가 저토록 가슴저미는 향내를 뿜어낸다 말인가. 아니 어쩌면 이미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 향기가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저꽃을 보고는 내 가슴의 향기를 코로 꺼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슴에서 꺼낸 향기를 저 마당의 국화꽃에 스며들게 하고 다시 저 꽃나무가 풍겨주는 향기를 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향기를 맡는다는 뜻의 한자는 들을 문자 문(聞)이다. 문(門) 안에 귀이(耳)자가 붙어서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도 되고 향기를 맡는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다양한 수필을 많이 쓰시고 열반에 드신 지도 벌써 제법된 법정스님께서는 연꽃향기는 맡는 것이 아니고 들어야 한다는 글을 쓰시기도 했다. 지금 이 마당 저 마당 이 모퉁이 저 모퉁이에서 퍼져나가고 있는 국화의 향기를 스님께서는 틀림없이 듣고 있으리라.
그렇다면 불전이 들려주는 법문은 들을 일이 아니라 향기를 맡을 일이다. 금강경을 펼치는 순간 부처님과 수보리존자가 다정다감하게 대화를 나누는 언어 이전의 향기를 맡을 일이다. 맡을 일이 아니라 온 몸을 그 향기에 맡길 일이다. 그 향기에 눈도 맡기고 코도 맡기고 손도 맡기고 발가락도 맡기고 머리카락도 맡기고 심장도 맡길 일이다.
어느 후배는 여자친구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날에 주머니가 일체개공을 설하고 있어서 담장 옆에 피어있는 장미를 손으로 꺾으려다가 생각을 바꾸어먹고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냈다고 필자에게 문자를 보내온 적이 있다.
“장미를 선물하고 싶은데 주머니가 비어있어서 길모퉁이 장미를 선물하려다가 아니다 싶어 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을 꺼내서 보낸다. 내일부터는 심장 없는 사나이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살아 있어서 가끔 연락이 오는걸 보면 심장 없는 사나이는 아니다. 그 문자를 읽으면서 느닷없이 내 심장이 뜯겨나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 후배의 마음만큼은 진실한 것임을 문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원효스님은 ‘대승육정참회문’에서 다음과 같은 향기짙은 말씀을 하고 있다.
猶如幻虎 還呑幻師
유여환호 환탄환사
비유하면 마치 마술사가 만든 허깨비 호랑이가
도리어 마술사를 집어삼기는 것과 같다네.
중생은 없을 짓는다. 자신이 지은 업이 사실은 실체가 없는데 실체가 없는 업이 업을 지은 중생을 홀까닥 집어삼켜 버리는 것을 호랑이로 비유하고 있을 뿐이다. 목구멍 깊이 가시가 박힌 호랑이가 가시를 빼달라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입을 쩌억 벌려대자 사람들은 그만 혼비백산 도망가기에 바빴다. 어떤 남루한 옷차림을 한 스님이 지나는데 호랑이가 달려가서 입을 벌렸다.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아이고 오늘 불쌍한 스님 한 분이 열반에 드시는구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스님은 호랑이와 눈을 잠시 맞추더니 손을 들어 호랑이 입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사람들은 저 스님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후 스님이 호랑이 목구멍 속에서 가시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사람들이 환성을 올리고 있는 동안 호랑이는 마음으로 감사의 삼배를 스님에게 올리고 숲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던가 뛰어갔던가 하는 비슷한 얘기를 전에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마술사도 홀로그램이고 호랑이도 홀로그램이다. 마술사의 손놀림은 홀로그램의 빛의 움직임으로 나타나서 홀로그램 호랑이를 만든다. 그런데 어느순간 그 호랑이가 마술사를 덮친다.
전에 어떤 후배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현대 테크노 기술을 법당에 도입하면 참 재미있는 풍경이 연출될 수 있다. 연화대에 앉아계신 부처님이 홀로그램으로 걸어나와서 108배를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깜박 졸고 있는 사람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주려다가 꿀밤 한 대 때린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법당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홀로그램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인다. 일년 내내 그렇게 하기에는 예산문제가 있지만 한 일주일동안 퍼포먼스로 해도 좋을텐데 아직 이 시스템을 도입하는 법당이 없어서 좀 아쉽다고 했더니 후배는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그저 웃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뼈도 있고 살도 있고 장기들이 매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 몸도 밀도가 빛보다 높은 홀로그램일 뿐이다. 뼈는 고체덩어리가 될만큼 홀로그램의 빛 밀도가 높다. 혈액은 액체상태를 유지하는 빛에너지이다. 실제로 우리가 콧구멍으로 들이 마시는 기체인 산소가 액체인 혈액과 고체인 뼈마디 속으로 들어가서 숨도 쉬고 밥도 먹고 먹은 것을 내보내는 작용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둘러보면 사람모양을 하고 있는 홀로그램 호랑이들이 여기저기 가시가 박혀서 가시를 좀 빼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다가올 때는 입을 쩍벌린 호랑이처럼 다가오기 때문에 사람들이 움찔하면서 피하게 된다. 그 움찍거리면서 피하는 사람도 때로는 가시박힌 홀로그램 호랑이가 되어서 다른 사람을 덮치는 수가 더러 있다. 서로가 서로를 덮치기도 하고 떼거리로 덮치기도 한다. 같은 지구에 살면서 땅과 바다와 허공에 금을 그어놓고 우리나라 남의 나라하면서 호랑이의 발톱과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기도 한다. 결코 사나운 발톱이 아니라고 우기는 수도 있지만 매니큐어 끝부분에는 호랑이 털이 가을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옷을 입어서 털을 가린다. 소맷자락 밖으로 삐져나오는 털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원효스님은 <안의비설신의>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짓는 업을 참회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회하는 주체도 홀로그램일 뿐이고 지은 업도 홀로그램 빛이 고체덩어리로 혹은 보이지 않는 기체 덩어리로 굳은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홀로그램 놀이가 그 전체가 긴 꿈일뿐임을 알고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그것을 원효 스님은 <대승참회>라고 힌트를 주신다.
꿈속에서 홍수를 만나 큰 물에 떠내려가게 되면 머리로 도리질을 하고 손을 허우적대면서 그 물에서 빠져나오려고 태아시절 어머니의 태중에서 하던 수영솜씨까지 동원한다. 옆에서 그 꿈을 꾸는 사람이 드러누워 소리 지르고 손을 휘젓는 것을 지켜보면 참 재미있기도 하다.
잠잘 때 코를 크게 고는 사람과 이를 부드득부드득 가는 사람이 같은 방에서 잠을 자는 경우, 옆에서 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 다 세상모르고 각자 악기를 연주하면서 실컷 잠을 자는데 이튿날 아침에 한 사람은 저 사람이 코를 얼마나 심하게 고는지 한숨도 못잤다고 책망을 한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밤새 코를 골면서 잔 사람은 저 사람이 이를 모래가루가 되도록 가는 바람에 밤새 악몽에 시달려 반숨도 못잤다고 대꾸를 한다. 옆에 있는 우리는 개그콘서트보다 더 실감나는 개그쇼라고 박수를 치면서 웃는다. 꿈은 깨어도 꿈이다. 꿈자체가 사라지면 비로소 크고 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다.
조계사 마당 한켠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서 있노라면 국화꽃 송이송이들이 법당 앞 허공에서 한 송이 큰 홀로그램 국화꽃으로 피어난다. 그 꽃을 향해 합장하는 내 손가락도 홀로그램이고 내가 듣고 서 있는 마당의 흙도 홀로그램이다. 홀로그램 국화꽃에 온 몸을 맡기면 홀로그램이거나 말거나 향기가 육근을 가득가득 채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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