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부터는 자신이 처해있는 모든 상황에 관계없이 마음씀씀이가 큼지막해 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공부가 잘 진행되고 있으면 더욱더 마음의 그릇을 넓힐 일이다.
현재 아프거나 하고 있는 일이 장애에 부딪쳐 있다 하더라도 ‘올커니, 불보살님께서 혹독한 수련코스를 마련해놓으셨구나.’하고 코끼리처럼 길고 깊게 한숨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쉬면 그런대로 틀림없이 견딜만 해진다.
내 콧구멍으로 들이마신 숨이 발가락 끝과 손가락 끝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순간순간 지켜볼 수만 있으면 몸의 통증도 엄청나게 체감적으로 줄어든다. 그러나 자신의 호흡을 놓쳐버리고 헐떨헐떡 숨을 쉬게 되면 통증의 정도가 순간순간 확장된다.
금강경의 한 구절을 읽어본다.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須菩提言 甚大世尊
수보리언 심대세존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처럼 크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몸이 큰 것이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몸이 큰 것이 아니니
그 이름을 큰몸[大身]이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육조스님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셨다.
色身雖大 內心量小 不名大身
색신수대 내심양소 불명대신
內心量大 等虛空界 方名大身
내심양대 등허공계 방명대신
色身 縱如須彌 終不爲大
색신 종여수미 종불위대
몸뚱아리가 슈퍼 헤비급으로 크다해도
내면의 마음 그릇이 쥐꼬리처럼 작으면
큰 몸이라 하지 않나니
내면의 마음의 그릇이 큼지막해서
허공세계와 같아야만 비로소 큰 몸이라고 한다네.
몸뚱아리가 비록 수미산과 같다 해도
끝내 큰 몸이 될 수 없다네.
살고 있는 집이 크고 경제력이 있다해도 마음씀이 그에 걸맞게 큼직하지 않으면 절반의 부자일 뿐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크지 않으면 절반에서 다시 절반이 줄어든다. 꼬마도 부처님으로 보이고 거지도 관세음보살님으로 보여야 진정으로 큰 부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회사의 모든 직원과 내가 관리하고 있는 단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손아래 사람이 아니라 ‘불보살의 화신들로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거룩한 분들이구나’하고 알아차려야 비로소 진정한 단체장이라고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까딱 한 생각 옆으로 흘러서 자신만이 대접받아야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순간, 주위사람은 물론 본인의 마음고생이 실로 말로 다할 수 없게 돼버린다.
금강경을 거꾸로 외울 수 있다하더라도 금강경 구경도 못해본 사람이 부처님으로 보이지 않으면 금강경을 읽은 보람이 없다. 다른 모든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유마경의 《제자품》에 수보리 존자와 유마 거사가 대화를 나누는 내용이 있다.
유마 거사가 병이 들었을 때 부처님께서 수보리 존자에게 병문안을 가라고 권한다.
수보리 존자가 “저는 병문안 가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전에 유마 거사를 만났던 일을 털어놓는다.
“생각해보니 제가 옛날에 어느 집에 가서 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마 거사가 갑자기 나타나서 제 발우를 가져다가 밥을 가득 담아주고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수보리 존자여 음식에 평등한 사람은 모든 법에도 평등하고 모든 법에 평등한 사람은 음식에도 평등합니다. 이와같이 걸식을 행해야만 음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일체 중생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허물어뜨리며 승가대중에 들어가지 않아서 끝내 멸도를 얻지 않아야 하니 존자께서 이와같이 해야만 음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이말을 듣고 그만 멍해져서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발우를 그냥 두고 그 집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유마 거사가 또 저에게 말했습니다.
‘수보리 존자여, 발우를 가져가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래께서 허깨비로 만든 사람이 이와같은 일로 나무란다면 두렵겠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유마 거사가 말했습니다. ‘모든 법이 다 허깨비로 만들어진 법이니 존자께서는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무엇 때문 이겠습니까.
모든 언설이 이와같은 허깨비 모습을 떠나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자언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자의 성품을 떠나서 따로 문자가 없는 것이 해탈이기 때문입니다. 해탈의 모습이 바로 모든 법입니다.’
유마거사가 이와같은 법을 설할 때에 200명의 천자天子가 법안이 청정해지는 경지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일이 있기 때문에 유마 거사를 찾아가서 병문안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유마경의 내용은 더러 파격적인 내용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 파격적인 내용을 곧이곧대로 읽으면 유마경을 꿈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 된다. 문자언어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설해지고 있는 내용을 문자언어에 집착해서 읽으면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랴.
죽도록 귀여운 아들, 딸이 가끔 엉뚱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말을 듣지 않으면 엄마가 소리를 높인다.
“제발 나가 죽어라. 너랑 못살겠다.”
이웃집 사람이 이 말을 듣고 곧이곧대로 ‘저 엄마가 자식을 죽이려하는구나’하고 생각한다면 그 엄마의 생각을 꿈에도 모르는 것이 된다.
엄마는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나가 죽어라’하고 표현한 것 뿐이다.
긍정과 부정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불교경전의 내용이 때로는 더러 읽는 이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참으로 다양한 내용들이 나오고 어떤 경우에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가다듬어보면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병에 따라 그에 맞는 약 처방으로 설하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배 아픈 사람에게는 복통을 다스리는 약이 필요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람에게는 두통약이 필요하다. 혈액순환이 잘 안되는 사람에게 적당한 소량의 곡차는 적절한 약이 될 때도 있다.
의사선생님이 소량의 곡차를 권했다고 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오해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다리가 아픈 사람은 다리의 근육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켜야 하고 팔이 약한 사람은 팔의 근육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약해진 곳을 아시고 어떤 경우에는 목운동을 권하고, 어떤 때에는 걷기 운동을 시키고, 때로는 장거리 마라톤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마라톤이 좋다는 말을 듣고 발목이 아주 안좋은 사람이 무작정 따라하다가는 다리 전체를 몹시 고생시킬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는 어떤 경전이 지금 필요하고 적당한지 잘 알 수 없을 때에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스님을 찾아가 정중하게 여쭤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설날이 지나면 봄소식이 멀지 않다.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으니 나에게 맞는 경전이나 책을 붙잡고 차분히 읽고 또 읽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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