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아온다. 나이에 관계없이 한 해씩 젊어진다. 꼬마들은 묻지 않기로 한다. 지쳐있는 마음만 툭툭 털어내면 반드시 젊어지게 되어있다. 지난 일 년만 해도 나름대로 봉사를 한 것이 얼마이며 간절하게 수행한 것이 얼마이며 공부한 것이 얼마인가. 봉사하고 수행하고 공부한 만큼 젊어지는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조계사도 세월이 흐를수록 활기가 넘친다. 아픈 이도 참배하고 연인들도 참배하고 괴로운 이도 즐거운 이들도 찾아온다. 모두 넉넉하게 품어주고 있으니 활기가 없을 수 없다. 사바세계에 이런 일 저런 일이 없는 때가 없으니 부처님 손바닥에서는 잠시 내려놓기도 할 일이다.
금강경(금강반야바라밀경, 金剛般若波羅蜜經)의 제 12분인 존중정교분(尊重正敎分)을 읽어본다.
復次須菩提
부차수보리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수설시경 내지사구게등
當知此處 一切世間天人阿修羅
당지차처 일체세간천인아수라
皆應供養 如佛塔廟
개응공양 여불탑묘
또 수보리여!
이 경을 해설하는데 사구게 까지만이라도 설하면
이곳은 일체세간의 천인과 아수라가 모두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묘에 공양하는 것처럼 하느니라.
사구게는 꼭 숫자에 얽매일 일이 아니라 금강경의 어느 한 부분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금강경의 일부분만이라도 수지독송하면서 다른 이를 위해 설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아수라까지도 부처님의 탑묘에 공양을 올리는 것처럼 공양하면서 존중한다는 이야기이다.
일자다자총지법문(一字多字 摠持法門)이라는 말이 있다. 한 글자에도 진리 천체가 들어있고 책 한권에도 들어있다는 말이다. 다라니의 맨 앞에 있는 ‘옴’자에는 한글자이긴 하지만 실제로 우주전체의 기운이 들어있지 않은가.
수지독송(受持讀誦)을 생각해본다. ‘수(受)’는 경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지(持)’는 내 몸의 세포로 만든다는 뜻이다. ‘독(讀)’은 책을 보면서 읽는 것이고 ‘송(誦)’은 그렇게 읽다보면 책을 보지 않아도 저절로 읽어지는 것이다.
가방에 넣고 다니기만 해도 물론 공덕이 있겠지만 경전의 한 구절이라도 내 몸속의 혈관을 따라 대동맥을 굽이쳐 흘러 모세혈관까지 흘러가고 다시 정맥을 따라 심장으로 돌아오고 다시금 활기차게 손끝발끝까지 흘러가게 큰소리로 읽고 또 읽어볼 일이다.
고성염불에 공덕이 있는 것처럼 경전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내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온몸의 세포를 진동시키고 넓게는 우주로 퍼져나가서 은하수를 출렁거리게 하기도 한다. 소화도 기가 막히게 잘 된다. 실제로 독송을 큰소리로 조금만 해보면 바로 시장기가 느껴진다. 다이어트에도 큰 도움이 되고 남성의 경우 근육과 알통이 튼튼해진다.
何況有人 盡能受持讀誦
하황유인 진능수지독송
須菩提 當知是人
수보리 당지시인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더구나 어떤 사람이 금강경 전체를
수지독송하는 경우야 어떻겠느냐.
수보리여!
이 사람은 최상의 제일가는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若是經典所在之處
약시경전소재지처
則爲有佛 若尊重弟子
즉위유불 약존중제자
가령 이 경전이 있는 곳은
바로 부처님이 계신 곳이 되며
존중받는 제자들이 있는 것과 같게 되느니라.
금강경 전체를 수지독송하는 공덕이야 말해서 무엇하랴. 우선 일부분 수지독송이라도 도전해볼 일이다.
새해가 되었으니 발심을 다시금 가다듬는 의미에서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에서도 몇 구절 읽어본다.
共知喫食而慰飢腸
공지끽식이위기장
不知學法而改癡心
부지학법이개치심
음식을 씹어 먹어서 주린 창자를 위로하는 것은 다함께 알고 있으면서 부처님의 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 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구나.
이 구절은 읽을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져온다. 내 입을 거쳐 창자로 들어간 음식의 무게만큼 같은 무게의 책을 읽었는가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창자는 갈수록 무거워지고 머리는 갈수록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금년에는 양쪽 무게의 차이를 최대한 좁히는 정진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책만 읽는다고 어리석은 마음이 고쳐질리 없다. 세탁기에 확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진리가 담긴 책은 확실히 마음의 때를 벗겨주는 세제 역할을 한다. 경전이라는 초고성능 세탁기에 온 몸과 온 마음을 다 던져 넣어볼 일이다. 혹 머리가 부딪쳐 혹 몇 개 났다가 가라앉은들 뭐 대수이겠는가.
人惡尾蟲 不辨淨穢
인오미충 불변정예
聖憎沙門 不辨淨穢
성증사문 불변정예
사람들이 꼬리달린 벌레인 구더기가 깨끗하고 더러운 곳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성현들께서는 사문이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가리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시느니라.
아이쿠. 이 구절에 이르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엄습한다. 진짜 내려 앉았나하고 가슴에 손을 대보면 여전히 쿵쿵 잘 뛰어주고 있긴 하다. 구체적인 예를 들것 없이 불제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온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望龍象德 能忍長苦
망용상덕 능인장고
期獅子座 永背欲樂
기사자좌 영배욕락
부처님 같은 용상의 덕을 갖추기를 바라면서 기나긴 고행을 잘 참아내고 사자좌에 앉기를 기약하면서 욕망과 쾌락을 영원히 등져 버릴지어다.
용은 물에 사는 짐승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짐승이고 코끼리는 육지에 사는 짐승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짐승이다. 우리 부처님은 일체 중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덕을 용상덕이라고 한다.
부처가 되고자 서원을 세웠다면 마땅히 길고긴 고행이라 할지라도 잘 참아야하는 것은 구구단의 일단처럼 상식이다. 사자좌에 무심코 덥석 앉았다가는 잘못하면 사자에게 뒷덜미를 물릴지도 모른다.
재가불자라 할지라도 수행의 준엄함을 알아야 하는 법이니, 내 자신의 마음 깊은 속에 똬리를 잔뜩 틀고 있으면서 꿈틀거리고 있는 온갖 욕심의 뿌리가 몇 미터 깊이 박혀서 실뿌리를 뻗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적멸궁을 장엄하시는 것은 다겁의 고해에서 욕심을 버리고 고행을 하셨기 때문이고 중생들이 화택문에서 윤회하고 있는 것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