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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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전(佛典) 속 명구(名句) 여행] 8. 발심수행장의 한 구절




 조선 시대의 어느 선비가 하루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받았다. 열어보니 ‘좌사우사중언하심左糸右糸中言下心’이라고 뜬다.

우물가에서 잠시 스쳤던 낭자가 보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뜻을 빨리 말해야 한다. ‘좌사우사중언하심’을 다 합치면 그리워할 연(戀)자가 된다.

선비는 문자를 씹지 않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일점삼구우두불각一點三口牛頭不角’. 하나의 점에 입이 세 개 달려 있고 소머리에는 뿔이 달려있지 않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전에 언젠가 강의시간에 이 내용을 소개했더니 “입이 세 개라니 거 뭐 야한얘기 아닙니까?”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점삼구’는 ‘말씀 언(言)’자이고 ‘우두불각’은 ‘자축인묘진사오미’에서 ‘오(午)’자이다. ‘말씀 언
(言)’자를 자세히 보면 맨 위에 점이 하나 찍혀있고 ‘석삼(三)’에 입구(口)이다. ‘소 우(牛)’자에서 중간 꼭대기를 뚫고 솟아있는 뿔을 없애면 오자이다. 

그러면 무슨 뜻인가. ‘言’자와 ‘午’자를 합친다. ‘허락할 허(許)’자이다. 조선시대에 무슨 핸드폰이 있어서 문자를 주고받은 것이냐고 묻는 센스를 지구 밖으로 보내버린 독자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워할 연(戀)’자를 등장시킨 것은 일요일 오전에 받은 전화 한 통 때문이다. 이름이 등록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진동으로 해놓은 핸드폰 화면에 떴다. 무슨 홍보전화는 아니라는 직감이 들어서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규택이 입니다.”

문득 다른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반갑게 대꾸를 했다.

“아이고, 박규택 감독님. 영화 개봉한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시절 발심수행장 공부를 열심히 했던 후배이다. 인터넷에 한문공부모임 카페를 하나 만든 적이 있다. 지금도 없애지는 않았지만 황무지가 되어 있다. 2000년대 초반에 대학에 입학했던, 전화를 건 후배가 그 카페에서 사용했던 아이디가 ‘유연화심有戀火心’이다.

발심수행장의 한 구절을 읽어본다.


拜膝如氷 無戀火心
배슬여빙 무연화심

절을 하는 무릎이 얼음장처럼 시려와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지 말지니라.

 산속 기도처에서 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108배나 3000배를 하다보면 난방장치도 없고 무릎이 시려오기 시작한다. 손바닥도 발바닥도 얼어붙는다. 따뜻한 불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허나 우리의 원효 스님은 단호하게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내지 말지니라.”하고 준엄한 말씀을 내린다.

이 후배는 ‘저는 아직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하는 뜻으로 ‘유연화심有戀火心’이라는 아이디를 정한 것이다. 찰나에 잠시 만감이 교차했다.

“영화제목이 뭐라고 했드라…”
“예 ‘터널’입니다.”
“언제 개봉한다고 듣긴 했는데…”
“예, 선생님. 8월 13일 개봉인데 신사동에서 컴퓨터 그래픽 작업하고 있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우리의 후배가 무슨 옛 생각이 났는지 그만 울먹거리면서 살짝 훌쩍거린다.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안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닫았다.

영화제목이 ‘터널’이라 우리의 후배는 이제 험난한 영화감독이라는 터널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남산 산책로로 가는 길에 그리 길지 않은 터널이 하나있다. 그 터널을 지날 때 발심수행장을 큰 소리로 읊조리면 메아리가 웅웅 울리곤 했다.


助響巖穴 爲念佛堂
조향암혈 위염불당

哀鳴鴨鳥 爲歡心友
애명압조 위환심우

메아리가 도와주는 바위 동굴로
염불당을 삼고 슬피 우는 산새로
마음을 달래주는 벗으로 삼을지니라.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구절이 저절로 생각나곤 했다.

후배랑 통화를 하고 나서, 난 지금 어느 터널을 지나고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본다. 크게 보자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가 생사의 터널이기도 하다. 그 큰 터널 속에서 조그만 터널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가 하면서 가긴 가고 있는 지금 나의 발걸음은 어느 터널을 딛고 있는 중인가.

지금 새벽에 원고를 쓰고 있는 이 연구실에서 자하문 터널이 가깝다. 새벽에 책상에 앉아 있노라면 터널로 들어가고 터널에서 나와서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꼭 해조음처럼 들린다. 자동차들이 터널로 들어가는 소리는 바닷물이 저쪽으로 ‘쏴아~’하고 밀려가는 소리이다. 터널에서 나와 달려오는 자동차들의 소리는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소리이다. 밀려가는 소리와 밀려오는 소리가 한꺼번에 겹쳐서 들려오기도 한다. 가끔 빵빵 소리가 나면 아 자동차소리였지 하고 바다로 갔던 생각이 돌아온다. 터널이라는 영화를 찍은 후배가 영화감독이라는 터널도 잘 통과할 것이라고 믿는다.

며칠 전부터 이번 호에서는 통증의 주파수와 호흡의 주파수를 연결시켜서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고쓰기를 미루고 있다가 후배 전화를 받은 인연으로 다른 터널을 잠시 다녀왔다.

통증이나 답답함이 심하게 느껴지는 부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들이마신 호흡에너지가 전달되지 않고 있는 곳들이다. 우리 몸도 몸 안에 수많은 터널들이 있는데 그 터널들은 호흡에너지가 쑥쑥 잘 통과해주면 문제가 별로 없는데 목에서 어깨로 내려가는 휘어진 터널을 호흡에너지가 통과하지 못하면 목이 결리고 어깨가 답답해진다. 쑤시고 저리고 뼈가 으깨지듯이 아파오기도 한다. 파스를 붙이고 물리치료도 받아보고 침을 맞고 뜸을 떠도 여전히 괴로운 경우가 많이 있다.

통증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 통증의 주파수에 맞는 대응책을 쓰지 않거나 마음을 다른 터널에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호흡을 지긋하게 가다듬고 통증을 바라보면 통증의 주파수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저릿저릿 뜨끔뜨끔하면서 뻐근한 증세는 모두 통증이 보내는 주파수이다. 통증의 주파수에 호흡의 주파수를 잘 일치시킬 수만 있으면 통증은 많이 경감될 수 있다.

산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채여 발가락이 부러진 것처럼 아플 때 발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잠시 후에 다시 걸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진짜 부러진 경우에는 누구에게 업히거나 해야 된다. 발목을 부여잡고 고개를 푹 숙인 상태에서 우리가 무심결에 하는 것이 바로 호흡의 주파수 조절이다. ‘컥’하고 숨이 막히는 것을 꾹 참고 숨을 조금씩 조금씩 뱉으면서 통증과 호흡이 맞추어가는 작업을 사실은 하고 있는 것이다.

만성통증을 일으키고 있는 부위도 마음을 집중해서 호흡의 주파수가 만성통증의 주파수에 맞도록 조절하면 안 아픈 건 아니지만 아픔과 많이 친할 수 있게 된다. 터널 속에 바위가 있으면 자동차들이 조심조심 달린다. 통증이라는 터널 속에 바위를 잘 피해서 호흡이라는 자동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면 바위와 부딪치지 않을 수 있다. 호흡자동차가 터널 속의 깊은 통증바위와 콱콱 부딪치면 걷잡을 수 없이 통증의 주파수가 증폭된다.

호흡자동차를 뼈마디 속의 골수터널에 들어가도록 운전을 잘 하기만 하면 골수 속의 통증바위를 자동차에 실어서 밖으로 꺼낼 수 있다.
호흡자동차의 운전수는 내 <마음> 이다.
옛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一息不來 便是來生
일식불래 변시내생

한 호흡이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내생이라네.

 호흡을 잠시 가다듬고 나의 호흡자동차가 지금 어느 터널을 어떻게 가고 있는지 지긋이 바라볼 일이다.





· 글: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 출처:미디어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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