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조계사 신행단체에 계시는 보살님께서 봉정암 참배에 초청을 해주셨다. 오래전부터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못가본 터라 감사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7시 반 조금 넘어서 조계사 일주문을 출발했다. 대웅전에 참배하러 가는 바람에 버스에 타지 않은 보살님을 태우려고 버스가 조계사 일대를 한 바퀴 휙 돌았다. 아, 버스도 조계사 부처님께 이렇게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강변을 달리면서 차가 밀리기 시작했다. 현충일이 금요일인데 휴일이다 보니 보통 밀리는 것이 아니었다.
신행단체의 단장님께서 한 마디하고 나서는 교통체증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다. 그때 염라대왕이 묻는다.
“그대의 국적은 어디인고?”,
“예, 대한민국입니다.”,
“오호, 그러면 봉정암은 가보았느냐?”
지금 우리는 봉정암을 가고 있다. 이제 염라대왕을 만나도 걱정할거 하나도 없다. 나는 도리어 물어볼 생각이다.
“염라대왕께서는 봉정암에서 백팔배를 해보았습니까?”
용대리까지는 버스가 갔지만 백담사까지는 줄을 서서 다른 셔틀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백담사 주차장에서 봉정암 가는 산행길로 접어들자 벌써 설악산의 입체적인 기운이 온몸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물은 맑고 돌은 하얗다.
토요일에 취옹정기醉翁亭記를 공부하는 보살님은 벌써 취옹정기의 구절을 줄줄 소리내어 설악산 계곡을 향해 읽고 있다. 설악산 전체가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있다.
증명법사님으로 동참한 범준 스님은 여유롭게 한걸음 한걸음 여법하게 걷고 있다. 예정보다는 조금 늦게 점심공양을 하기로 한 영시암에 도착했다. 0.1톤 가까이 되는 듬직한 거사님은 말도 부지런히 하면서 행동까지 부지런하여 점심공양을 마치고 아주 빠른 속도로 봉정암까지 나는 듯이 달려가서 저녁공양과 숙소까지 마련했다고 다른 보살님께서 증언을 했다.
영시암에서 봉정암을 오르는 골짜기 골짜기마다 기암절벽과 옥빛 물빛을 자랑하는 계곡이 이어진다.
동파거사東坡居士의 게송이 저절로 떠오른다.
溪聲便是長廣舌 계성변시장광설
山色豈非淸淨身 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타일여하거사인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장광설 법문이니.
산빛이 어찌 청정비로자나법신이 아니리오.
간밤에 들은 팔만사천 게송의 핵심을
다른 날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해줄꼬.
山色豈非淸淨身 산색기비청정신
夜來八萬四千偈 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 타일여하거사인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가
바로 부처님의 장광설 법문이니.
산빛이 어찌 청정비로자나법신이 아니리오.
간밤에 들은 팔만사천 게송의 핵심을
다른 날에 어떻게 사람들에게 말해줄꼬.
네 번째 줄의 거사擧似는 ‘들 거’ 자에 ‘비슷할 사’자여서 비슷한 것을 들어올린다는 뜻인데 “말하다”의 뜻이다. 그렇다. 말이라는 것은 결국 비슷한 것을 예로 들어서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필자가 봉정암 다녀온 이야기를 쓰고 있지만 이 지면에다가 설악산 봉정암을 쑥 들어올려서 이 종이 위에 올려놓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중국 송나라때 동파거사가 어느 절에서 밤새 큰스님과 무정설법無情說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생명체가 없다고 하는 무정물도 설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파거사가 다음날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데 문득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법문으로 귓전을 파고 들었다. 이따금씩 스치는 바람소리와 더불어 시원하게 계곡을 흘러내리는 물소리에 가슴이 시원해진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있다.
큰스님과 대화를 나누고 내려오던 동파거사의 온몸 세포 세포마다 무정물인 시냇물 소리가 흘렀다. 그 순간에 내가 계곡이 되고 계곡이 내가 되는 체험을 동파거사는 했던 것이다. 아마 깊이 막혀있던 혈관이 시냇물 소리를 듣는 순간에 툭하고 풀려서 시원하게 흘려주었을 것이다. 막혀있던 혈관이 밖으로 터지면 큰일이다. 뇌졸중이나 중풍으로 가기 십상이다. 혈관 안에서 안으로 툭 터져서 막혀있던 피가 콸콸 흘러주면 진심으로 시원해진다.
그렇게 온 시냇물 소리가 온몸에 가득 흘러가는 동파거사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니 사방의 산봉우리와 산 전체가 이제 부처님의 몸으로 보인다. 눈과 귀가 번쩍번쩍 열린 것이다. 새삼 깨달았다기보다는 깨달음이 확장되면서 입체적으로 증폭되는 체험을 한 것이다.
봉정암에 도착해서 저녁공양을 마치고 대웅전에 참배를 하고 사리탑으로 가는데 봉정암의 주지스님께서 말을 건네신다.
“사리탑에 가보았습니까?”, “봉정암이 처음인데 아직 탑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가는 길입니다.”, “예, 봉정암은 사리탑을 보고나서 얘기해야 합니다.”
참으로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고 있다. 사방이 밤으로 물들어 있다. 하늘에 많은 별이 뜨진 않았지만 서울에서 보는 별빛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사리탑 주변 약간 비탈진 곳에 자리 잡고 앉아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탑이 눈에 들어온다. 탑이 내가 되고 내가 탑이 되는 느낌이 든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 몸이 탑이다. 층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발가락에 골반까지는 기단석이다. 머리꼭대기까지 탑을 쌓아 올리는데 5층으로 쌓아올려도 되고 7층으로 쌓아올려도 된다. 머리꼭대기 끝에다가 또 탑을 쌓아올려서 쭉쭉 한 층 한 층 쌓아올리다 보면 어느새 안드로메다가 저만치 발아래로 보이는 경우도 있다.
기단석이 틀어지면 탑 전체가 틀어지듯이 우리 건강도 양쪽 발목이 틀어지면 몸전체가 틀어진다. 걸음마 무렵에 발목을 한쪽 살짝 다치면 나중에 골반통으로 시달리는 경우가 아주 많다. 만성척추통증에 두통까지 온갖 통증을 다 겪어보게 되기도 한다. 어릴 적에 다친 발목이나 손목을 강화시켜서 튼튼하게 해주면 여러 가지 통증이 저절로 해소될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지금 월드컵 축구가 한창인데 선수들끼리 발목도 걷어차고 머리를 들이받고 하는 수가 더러 있다. 안될 일이다. 저 선수가 나의 길을 막는다고 발목을 차버리면 축구경기 전체가 망가진다. 상대 선수가 나의 무릎을 차면 죽을 듯이 아픈 것처럼 내가 상대선수의 발목을 걷어차면 아프다는 걸 동시에 알아야 할텐데 경기에 불이 붙으면 눈에도 불이 붙어서 잘 안 보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다시 봉정암 사리탑으로 돌아온다. 탑 너머 봉정암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 전체가 자세히 보니 부처님의 모습이다. 아까 계곡을 올라올 때는 계곡물소리가 설법을 해주었고 지금은 저 사리탑이 말없이 법문을 들려주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특히 신행단체 한 분 한 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선발대로 활약하는 분도 계시고 중간에 낙오하는 사람은 없나 노심초사해가면서 살펴주신 분들 덕택에 봉정암 참배 산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이 조계사보의 제목이 <가피>인데 봉정암 참배도 시방삼세 제불보살님의 가피가 아닐 수 없다.
동파거사의 눈에 온 산이 부처님이 되고 온 계곡물 소리가 부처님의 법문소리였다는 게송을 읽은 지가 제법 되었는데 이번 봉정암 참배를 통해서 그 이해가 참으로 입체적으로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다. 동파거사의 눈과 귀뿐이었겠는가. 그 순간에 동파거사의 코에는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공기가 법향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안이비설신의에 들어오는 색성향미촉법의 모든 대상들이 다 부처님으로 실감나게 다가왔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디 산과 계곡뿐이겠는가.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서울도 마찬가지이다. 저 가로등은 불보살님께서 길을 비추어주시는 손전등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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