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풍경을 여러 사람이 함께 본다. 어떤 사람은 진한 감동을 일으킨다. 조계사 마당에 걸린 연등은 여러 많은 사람의 가슴에 진한 감동의 여운을 아직도 남겨주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저 그런 반응을 보인다.
실제로 어느 택시기사님은 세종로의 연등을 필자와 함께 보면서 왜 저런 걸 해마다 거는지 모르겠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 택시기사님의 본마음이 연등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라 어떤 편견이 후천적으로 심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시청 앞에 걸린 연등은 아름다워 보이는데 크리스마스트리의 꼬마 전구가 반짝이는 불빛은 그저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의 편견이다. 연등이든 트리든 세상을 밝게 밝히고 우리의 마음까지 밝혀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같은 것을 보면서 다른 반응을 보이고 다른 감정이 일어나고 실제로 몸의 근육반응까지 달라지고 뇌세포의 진동 파장 주파수까지 달라지는 것일까. 그 풍경을 보고 그 물건을 보고 그 사람을 보면서 그리는 마음속의 그림이 서로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미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선글라스에 색칠을 한 채로 바깥 대상을 보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보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속 그림이 눈을 통해 밖으로 쑥 나가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접혀있던 낙하산이 공중에서 펼쳐지면 낙하산 모양이 되듯이 우리 마음에 접혀있던 한 생각이 펼쳐져서 가지가지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心如工畵師 심여공화사
造種種五陰 조종종오음
마음은 솜씨가 기막힌 화가와 같아서
가지가지 오음의 그림을 그려낸다네
멀리 갈 것 없이 내 몸은 정확하게 내 마음이 조각하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손가락 끝의 뼈마디와 뼈마디 속의 골수와 뼈마디를 연결해주고 있는 관절시스템과 그 시스템은 유지해주는 인대 근육시스템과 피부와 모공 시스템까지 정확하게 우리 자신의 마음이 그려놓은 것이고 뇌세포 하나하나까지도 다 마음이 입체적으로 그려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몸의 건강상태는 정확하게 내 책임이다.
간의 건강상태가 썩 좋지 않은 것은 분명 간의 상태가 그렇게 되도록 하는 신구의 삼업을 내가 지었기 때문이다. 신업은 마음이 몸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구업은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의업은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형상과 귀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와 코에 들어오는 모든 향기가 사실은 이미 내 마음이 이미 내 마음속에 그려놓은 것이다.
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한 것은 그렇게 더부룩하고 답답해지도록 하는 그림을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지우는 기막힌 지우개가 있으니 바로 정삼업진언이다.
정구업진언이다. 참회진언이다. 뼛속 골수 깊숙이 입체적으로 스며드는 <미안합니다>하는 마음이다. 그 골수가 기쁨에 찬 마음으로 진동하면서 온몸에 파장에너지로 전달되게 하는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이다.
진언이든 염불이든 간에 그 소리가 즉 내 입으로 낸 소리가 내 귀로 들어오는 것이 좋다. 내가 절실한 마음을 일으켜 내는 소리가 내 고막을 통과해서 내 달팽이관을 진동시키는 찰나에 내 마음의 절실함이 우주 입체적으로 증폭되면서 부정적으로 그려져 있던 그림이 대大긍정에너지의 그림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켜놓고 설핏 잠이 들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을 때 귀에 들어오는 소리가 잠든 의식 상태에서 영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많이들 경험한다. 지지난번에 소개했던 어사 박문수는 칠장사에서 어떤 경험을 했던 것일까. 상상의 날개를 잠시 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선잠이 살짝 든 청년 박문수의 귀에 나한님들이 불러주는 시구가 들어온다.
첫 번째 나한님이 ‘落照吐紅掛碧山 낙조토홍괘벽산’하고 첫째 구절을 부르자 선잠이 들어있는 청년의 눈앞에 푸르스름한 기운을 띈 서산에 막 넘어가는 붉은 석양이 입체 동영상으로 펼쳐진다.
두 번째 나한님이 ‘錦雅尺進白雲間 금아척진백운간’하고 부르자마자 석양을 배경으로 허공에 줄지어 날고 있는 금까마귀떼들이 날개를 퍼뜩 거리며 날고 있다. 대장 까마귀가 방향을 틀면 뒤따라 나는 까마귀들이 줄자가 곡선을 그리면서 변화하는 것처럼 흰 구름 사이를 가지가지 줄자 모양을 만들면서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세 번째 나한님이 ‘放牧園中牛帶影 방목원중우대영’하고 부른다. 청년의 시선이 산 중턱으로 향한다. 석양 무렵에는 그림자들이 짧아진다. 동네 어귀에 서 있는 키 큰 미루나무의 그림자도 나무 밑으로 바짝 다가온다. 산 중턱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의 그림자가 짧아져서 마치 그림자로 허리띠를 두른 것처럼 몸에 바짝 달라붙는다.
‘望夫臺上妾低鬟 망부대상첩저환’ 동네 어귀에 망부석이 있다. 일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아낙네가 저 먼 쪽을 바라보려고 고개를 좀 더 높이 드는 순간 아낙네의 머리 뒤쪽에 있는 쪽이 살짝 낮아진다. 청년의 눈앞에 나루터를 묻는 나귀 탄 나그네의 채찍이 휘둘러진다.
해지기 전에 숙소를 잡으려고 급해지고 있다. 나그네가 달려가고 있는 방향의 산 중턱 길에는 어느 스님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손에 든 지팡이가 휘적휘적 한가한 틈이 없다.
석양을 배경으로 정적인 화면과 동적인 화면을 번갈아가면서 비춰주던 동영상의 화면에 저녁밥 짓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솟아오른다. 이어서 동네 고목도 들어오고 야트막한 돌담장도 들어온다. 정겨운 된장국 냄새도 코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한님들이 불러주는 한 구절 한 구절의 시구가 살짝 잠이 든 청년의 고막을 통과하면서 기막힌 동영상 한 편을 만들었다. 그렇게 깊이 잠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과거장에 도착해서 과제를 보니 <낙조 落照>. 순간 청년 박문수의 뇌세포가 격동하면서 칠장사에서 꾼 꿈속의 동영상이 다이내믹하게 돌아간다. 나한님들이 불러주던 낭랑한 한 구절 한 구절의 소리가 들려온다. 붓을 들어 올리니 나한님들의 음성이 붓끝으로 들어가서 일필휘지 글씨가 돼서 나온다. 일곱 나한님이 불러준 일곱 구절을 쓰고 나자 저절로 여덟 번째 구절을 이제 붓이 알아서 쓴다.
‘短髮樵童弄笛還 단발초동농적환’ 시냇가 남쪽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을. 저 멀리 산 어귀에서 마을로 이어진 길을 머리가 짤막한 나무꾼 아이가 유유자적 피리를 불면서 돌아온다.
한시 감상의 요점은 한시를 지은 작가의 눈동자에 맺힌 입체 동영상이 읽는 독자의 눈동자에 함께 떠오르는가 하는 데에 있다. 한시를 읽는 순간 작가의 눈동자에 그려진 그림이 함께 그려지면 동시에 그 작가의 마음에 그려진 그림이 떠오르면서 문자로 표현해 놓은 시 구절들은 저절로 이해된다. 그림이 떠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문자만 쫓아가다 보면 가시덤불 속으로 들어가거나 질척질척한 진흙 뻘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 쉽다.
내 몸은 내 마음의 그림자이다. 호흡을 깊숙하게 들이마시고 고요히 눈을 감고 내 몸을 다시 입체적으로 그려보면 뭉친 곳이 풀리고 약해져 있던 곳이 정상회복된다.
이 세상도 내 마음의 그림자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과 저 사람이 그리는 그림이 조화를 이루면 평화로운 그림이 펼쳐진다. 스스로 돌이켜 내 마음 깊은 곳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점검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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