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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이해
정사(精舍), 가람(伽藍), 사원(寺院), 사찰(寺刹), 절, 절간, 산사(山寺)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는 사찰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佛像)이나 불화(佛畵) 등을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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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설법을 듣는 곳이다.
이러한 의미의 장소를 여러 단어로 불리는 까닭은 바로 불교가 인도에서 건너오면서 중국을 거쳐 한자로 음역되고 다시 우리나라로 받아들여지면서 단어가 상황에 맞게 변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불리우는 이름만 달라질 뿐 사찰이 갖고 있는 본연의 기능과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찰이 어떤 곳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단어 자체에 깃든 사연과 의미가 깊다.
정사(精舍)라는 말은 인도에서 사찰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인도에 있어서 최초의 사찰은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부처님이 녹야원(鹿野院)에서의 최초의 설법 후에 마갈타국의 수도인 왕사성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그 당시 마갈타국의 빈비사라왕이 부인 위제휘와 함께 왕사성 북쪽의 가란타 장자의 소유인 죽림(竹林)을 희사받아 그곳에 집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불교의 역사상 최초의 정사인 죽림정사인 것이다.
또한 범어 상가라마(samgharama)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한자로 음역하면서 승가람마(僧伽藍摩), 가람(伽藍)이라 불리우게 되면서 가람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중원(衆園)이라고 의역되기도 하는데, 이 모두를 총칭하여 정사(精舍)라고 번역한다. 중원이라는 말은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사나 상가라마가 상가(僧伽)의 거주처이지만, 정사는 주로 부처님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계신 곳을 말하고, 상가라마는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그의 제자들만이 거처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즉 정리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사찰을 인도에서는 정사나 가람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원(寺院)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인도에서 정사나 가람(상가라마)이라고 불리던 것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사(寺)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자(漢字)의 사(寺)는 공공기관의 뜻이 있어서, 중국에서는 사찰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이전에 관아에 붙여 쓰던 말이었다.
유래를 살펴보면 후한명제(後漢明帝) 연평(永平) 10년(67)에 인도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라는 두 스님이 흰말에다 장경(藏經)을 싣고 후한의 서울인 낙양(洛陽)에 왔을 때, 후한에서는 두 스님이 외국인이므로 관례에 의해 외국인을 위한 외무부 소속 관아(官衙)인 홍려사(鴻廬寺)에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 후 두 스님이 계실 마땅한 곳이 없어 그대로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홍려사라는 이름을 두 스님이 타고 오신 흰말을 기념하여 백마사(白馬寺)라고 고쳐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에 있어서 사찰의 효시이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승가(僧伽)들의 거처를 사(寺)로 부르게 되었다.
이 '사'라는 말과 더불어 원(院)이라는 말은 원래 주위에 둘러친 담을 말하는데 이것이 변하여 주원(周垣),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을 의미했으며, 관사의 이름에도 쓰였다고 한다. 당나라 시대에 칙명에 의하여 대자은사(大慈恩寺) 등에 번경원(번經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와 관련된 건물에 원(院)이라는 이름을 붙인 효시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찰은 범어로 비하라(vihara)라고 하고 비하라(毘訶羅)라고 음역하며, 수행을 하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주처(住處), 유행처(遊行處) 등으로 번역한다. 사찰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지만, 다음의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구려의 최초의 사찰인 성문사(省門寺, 또는 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와 더불어 신라에서도 제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墨胡子)가 일선군(一善郡)의 모례의 집에 와 머물면서 몰래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한다.
모례는 원래 국어의 ‘털례’를 한자로 음사한 것으로 ‘털례’의 집에 불상이 모셔져 있고, 불교인들이 모여서 믿음을 행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털례의 집은 가람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부처님을 모시고 불교를 행할 수 있는 집을 ‘털례’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털례’가 사찰로 변한 것이다.
절은 사찰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로, 그 연원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지만, 위의 텔례를 간단하게 부른 것이 절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절간은 절과 건물을 뜻하는 한자 간자가 합해져서 불리우는 단어이다.
이처럼 사찰은 많은 단어로 불리우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부처님과 스님, 불자들의 도량이란 뜻이다. 부처님을 상(象)이나 그림으로 모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승려들이 수행정진하며, 불자들이 더불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수행처란 의미가 가장 본연의 의미인 것이다.
사찰의 구조
사찰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佛像)이나 불화(佛畵) 등을 모신 곳이다. 더불어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가 수행을 하고 설법을 듣는 곳이다.
이러한 다기능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각 기능에 따른 여러 시설물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적인 건축공간을 형성한다.
여기서 공간 배치 문제가 발생하는데, 단순히 건축적인 면에서만 배치가 문제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각 기능과 위격이 다른 건조물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인가 하는 점에 그것이다.
그리하여 평면적인 배치 계획이 고안되었는데, 이를 가람배치라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람배치의 대표적인 형식은 탑원(塔院), 금당원(金堂院), 승원(僧院)의 복합배치 형식이다. 이처럼 탑을 모신 곳과 불상을 모신 곳, 그리고 스님이 거주하는 곳으로 나누어 구분하기도 하고, 탑과 금당의 배치형식에 따라 다르게 구분하기도 한다. 1탑 1금당, 2탑 1금당, 1탑 3금당의 형식이 대표적이다.
또, 탑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 배치 형식도 있는데 이것은 드문 편이나 조선시대의 가람배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전각(殿閣)과 종루(鐘樓), 고루(高樓), 경루를 포함한 수많은 부속건물과 천왕문, 일주문 등이 어우러져 매우 다양한 배치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구조로 이루어진 사찰을 들어가기 위해 통과하는 문들이 있다. 바로 일주문, 불이문, 천왕문, 금강문 등이다.
일주문(一株門)에서 시작하는 사찰의 경계를 통해 우리가 세속의 때를 벗고 부처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문이다. 산문(山門)이라고도 하는데,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 절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게 된다.
다음의 불이문(不二門)은 불이(不二)란 둘이 아닌 경계를 말하며 절대 차별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승속(僧俗)이 둘이 아니요,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니며, 중생계와 열반계 역시 둘이 아니니, 일체중생이 개유불성(皆有佛性)하여 이 문을 들어서면서 부처님의 이치를 깨우치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 한다.
천왕문(天王門)은 불국토를 지키는 동서남북의 사천왕을 모시는 문으로 이것은 불법을 수호하고 사악한 마군을 방어한다는 뜻에서 세워졌다.
금강문(金剛門)은 사찰에 따라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왼쪽에는 입을 다문, 오른쪽에는 입을 벌린 두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다.
이러한 문들을 통과하면, 앞서 이야기한 법당들이 위치한다. 이러한 법당들에는 불상이나 불화를 모시게 되는데, 이것을 일컬어 전각(殿閣)이라고 한다. 즉 ‘○○殿’, ‘○○閣’이라고 하는 건물들이 모여서 사찰을 이루게 되는데, 흔히 전(殿)은 각(閣)보다 계위가 높은 건물을 가리킨다. 이처럼 사찰의 구조물들에는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대웅보전(大雄寶殿), 대웅전(大雄殿), 팔상전(八相殿), 영산전(靈山殿),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이라고 하며,
비로자나부처님이나 삼신불·삼세불을 모신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전(毘盧殿), 화엄전(華嚴殿)이라고 한다.
아미타부처님을 보신 전각은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이라고 하며,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은 약사전(藥師殿)이라고 한다.
다음 보살(菩薩)을 모신 전각으로는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이 있고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지장전(地藏殿) 등이 있다.
각(閣)으로는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獨聖閣), 치성광여래를 모신 경우는 북극전(北極殿)이라고 하나 후기로 갈수록 칠성신에 대한 민간신앙이 강해지면서 칠성신을 모신 칠성각(七星閣), 산신이나 가람신을 모신 산신각(山神閣), 가람각(伽藍閣) 등과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화상을 모신 삼성각(三聖閣),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영각(影閣)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경전을 모신 장경각(藏經閣), 판전(版殿) 등이 있기도 한다.
이와 같은 법당이나 금당의 의미인 전각 말고도 스님들의 수행처이자 거주처가 있게 된다. 수행처로는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이 존재하고 거주처로는 우리가 흔히 요사라고 하는 노전(爐殿), 향로전(香爐殿) 등이 있다.
불상
부처님을 상(象)으로 만들어 모시는 일은 처음에는 금지된 일이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거의 5-600년 동안은 부처님을 상으로 만들어 모시지 않았다.
이 기간에 부처님이 바퀴, 의자, 족적, 수건 등으로 표현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하며, 이러한 시대를 인도의 무불상시대(無佛像時代)라고 한다. 불상제작의 최초기록은 우전왕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남아있지 않다.
처음에는 불상을 만드는 일보다는 부처의 사리를 나누어 탑을 세우는 사리신앙이 대세해 인도의 아쇼카왕 시대에는 부처의 성적지에 기념주를 세우는 일이 유행하다가 실제로 상을 만드는 일은 인도의 슝가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게 바로 1세기 무렵의 일이다. 이러한 불상의 발생지는 바로 서북 인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투라 지역이다. 이곳에서 불상이 만들어지면서 중국으로 전파되고 바로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한국의 불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불상을 만드는 일은 무형의 존재를 유형으로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는 일련의 법칙과 규칙이 존재하였다. 그것이 바로 32상80종호이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대각자인 부처님이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사람은 서른 두 가지의 신체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32상이라는 특출한 대인상을 타고 태어난다는 내용이 브라만교의 베다성전에 기록되어 있어서 이것이 불교의 초기경전으로 옮겨지면서 80종호가 더 추가된 것이다. 사실상 32상80종호의 내용들에 의해 상을 만들어야 되기보다는 그만큼 신격화된 존재로서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부각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더욱이 32상80종호의 세세한 내용들에 의거해서 불상을 제작하고자 하는 경우 사실상 조형적으로 불가능하다.
불상을 대부분 금(金)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32상80종호에 부처의 피부를 부드럽고 곱고 매끄러워 자금색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그래서 금동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외에도 상황에 맞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흙으로 제작한 소조불, 건칠불, 철로 제작한 철불, 목조불상, 석불상 등의 다양한 재료로 만든 불상이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불상은 뚝섬출토금동불상이다. 중국에서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단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불상으로 금동으로 제작된 소형의 불상이다.
금동불은 소형에서부터 대형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제작된다. 시기가 올라가는 불상의 경우는 휴대가 용이하게 소형으로 제작된 금동의 불상이 많으며, 더불어 석조로 제작된 경우도 많이 전해진다.
소조불은 흙으로 빚어 자연적으로 건조시키는 방법과 굽는 방법이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소조불로는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대표적인 예로서 구운 경우에 해당된다.
향나무, 은행나무, 육송, 적송 등의 목재로 제작되어지는 목조불상은 화재에 약하다는 단점 때문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목조불상은 1274년의 하한선을 가지고 있는 개운사(開運寺) 아미타목조불상이다.
건칠불(乾漆佛)은 흙으로 기본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옻칠한 종이로 형태를 감싸면서 만든 후에 처음의 소조상을 제거하면 남은 종이 형태가 불상이 되는 제작방법을 말한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많이 제작된 방법으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건칠불좌상은 보물1544호로 지정된 고려후기에 제작된 나주 심향사 건칠불좌상이다.
석불은 아마도 제작 조건과 내구성이 강했던 이유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특히 한국에는 전국에 걸쳐 순백 양질의 화강석이 대량으로 분포되어있는 자연조건의 혜택을 입어 일찍 석조기술이 발달한데 있다. 이것은 마애불, 즉 바위에 저부조나 고부조, 혹은 선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이 산천에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시기가 앞선 석불로는 부여 시내 군수리 탑의 심초석(礎石石)에 발견된 석불좌상이다. 부여에 이어 삼국시대의 수많은 석불들과 석굴사원의 개착에 이어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사실상 한국의 석불조각은 성황을 이루고 있어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석조불상이 많은 편이다.
철불(鐵佛)은 시대성과 지역성을 수반하여 제작된 종류이다. 특히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초 지방의 호족들을 배경으로 하고 중앙보다는 강원도와 같은 지방을 중심으로 한 같은 양식과 계보를 갖는 철불이 많이 제작되었다. 밀랍주조법으로 제작되어지는 금동불과는 달리 철불은 분할주조법으로 제작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위와 같이 다양한 재료에 의해 제작되는 불상을 구분하는 방법은 손의 표현, 즉 수인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하여, 한 손은 바닥을 내어 무릎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는 수인이다.
아미타여래의 수인은 흔히 구품인(九品印)이라고 하는데, 각 손의 엄지와 나머지 네 개의 손가락 중 어느 손가락을 잇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9개의 구분된 손갖춤을 말한다. 이는 중생을 구제할 때 그 중생의 근기에 따라 9가지로 나누어 구제할 수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비로자나 부처님은 한손의 엄지를 다른 손이 감싸안는 지권인(智拳印)으로서 구분한다.
이러한 수인 말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로 부처님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흔히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으며, 보살상의 경우 관음보살은 정병(靜甁)을 들고 있거나 머리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표현된 경우가 그 예라 하겠다.
불화
종교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교리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어 대중을 교화시키는데 있다.
불교회화 역시 종교화로서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부처님에서부터 여러 부처님들을 시각화하거나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 대중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회화는 시대에 따라서는 크게 고려불화와 조선불화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려지는 재료 등에 의해서 벽화(壁畵), 탱화(幀畵), 사경화(寫經畵)로 나눌 수 있고, 야외의식용불화인 괘불(掛佛) 등이 있다.
우선 시대구분에 의해 간략히 살펴보면, 고려시대의 불교회화는 현재 고려시대의 사찰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순 없지만, 현존하는 대부분의 불화들은 내세의 왕생과 구제를 기원하는 아미타여래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2-3점이지만 석가모니불도, 비로자나불도, 오백나한도, 16나한도, 제석천도 등이 전하고 있다.
화려한 색채와 기법 등의 이유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많다.
조선시대의 불교회화는 전각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다. 사찰의 전각 안에는 불상(佛像)과 불상의 바로 뒤나 전각의 내부 좌우벽면에 걸리는 불화(佛畵)가 있다.
전각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불화는 바로 불상의 뒤에 모셔지는 것으로 불상의 뒤에 걸리는 그림이라 하여 흔히 후불탱화(後佛幀畵)라 한다.
‘탱화(幀畵: ’幀‘자를 불교에서 ’탱‘으로 읽음)’는 불교의 그림을 가리켜 흔히 부르는 명칭으로, 대부분 전각에 그림이 걸려있게 되어있어 ‘걸려진 그림’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찰의 전각은 그 전각이 어느 부처님을 모셨는가에 따라 전각의 이름이 달라지는데, 마찬가지로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이 누구냐에 따라 후불탱화나 전각 내부의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석가모니후불탱이 그려지고, 아미타부처님을 모시는 경우라면 아미타후불탱화가 그려진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전각 내부를 불상을 모신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상단(上壇)·중단(中壇)·하단(下壇)으로 나누어 각 단에 걸리게 되는 그림의 종류와 성격을 달리한다. 즉 상단인 주불단에 메인이 되는 불화가 그려지고, 호법신을 그린 신중탱 등과 같은 그림들이 중단에 걸리고, 하단에는 영단(靈壇)이나 명부전(冥府殿) 등에 걸리는 그림이 모셔진다.
이처럼 어떤 부처님을 모시느냐에 따라 불화의 종류는 달라지며, 우선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린 그림과 보살을 그린 그림, 그리고 불교의 신들을 그린 신중탱, 의식그림인 감로탱 정도로 격에 따라 다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의식을 중시하게 된 조선시대 사찰에서 드러나는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불교회화에까지 적용된다고는 볼 수 없다.
이처럼 현존하는 불교회화들은 전각 안에 모셔지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그림의 종류와 성격이 달라진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시는 전각인 대웅전(大雄殿), 대웅보전(大雄寶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다. 이러한 전각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취산에서의 설법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석가모니후불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전각의 차이에 따라 팔상전에는 영산회상도와 더불어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그려지며, 나한전 등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걸리기도 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나 비로전(毘盧殿) 등에는 비로자나불회도가 모셔진다.
약사부처님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에는 약사불회도가, 아미타부처님을 보신 극락전(極樂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미타전(彌陀殿)에는 아미타불회도 등이 모셔진다.
보살이 주존인 전각에는 관음전에는 관음도(觀音圖)가 그려지고, 지장보살이 모셔진 명부전(冥府殿)이나 지장전(地藏殿)에는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가 그려진다.
주불이 누구냐에 따라 모셔지는 그림은 다르지만,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중단에는 그 전각을 지키는 호법선신을 그린 신중탱이 대부분 걸리게 된다.
벽화는 전각의 내벽이나 외벽 등에 그려지는 그림을 말한다. 전각의 구조에 따라 그려지는 장소가 달라지지만, 시기가 올라가는 벽화는 전각 내부의 공간이 상단을 중심으로 ‘ㅁ’자형인 경우 후불탱화가 걸리는 바깥벽에 그려지기도 하고, 좌우측 내벽에 그려지기도 한다. 또한 전각외벽에 그려지는 경우에는 선종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표현된다.
대규모의 그림을 조성하는 것 외에도 불교회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사경의 조성이다. 사경을 조성하는 것을 사성寫成이라고 하는데, 즉 손으로 경전의 내용을 베껴쓰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불교 자체가 워낙 경제력 있는 계층에 의해 신봉되었기 때문에 불상, 불화 조성의 불사를 넘어서서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 자체를 직접 사서하여 조성하는 것은 실로 큰 공덕이라 여겼다.
실제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사경의 수는 100여점이 넘는다. 특히 종이를 쪽이나 도토리 등으로 염색한 감지나 상지에 금은자로 사서하거나 머리그림을 금니로 그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경들은 고려불화의 그 유려하고 섬세한 미감과 같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불화의 성격과는 또 다른 불화로는 괘불(掛佛)이 있다. 괘불은 ‘거는 그림’이란 뜻으로 야외의식에서 사용하던 불화를 지칭한다.
고려시대에는 그 예가 없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의식이 공공연히 야외에서 행해지면서 제작된 것이다. 야외의식의 규모 정도를 감안한 전각 안에 걸리던 불화의 크기와는 사뭇 다른 엄청난 규모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불구(佛具)
사찰의 전각 안, 그리고 경내에는 여러 의식을 위하거나 공양을 위한 불구들이 있다.
흔히들 이것을 불교공예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기도 하는데, 본연의 의미는 의식과 공양을 위한 불구(佛具)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구 혹은 공양구라고 지칭한다.
먼저 의식구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전사물(佛殿四物)로 묶어 지칭되는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다.
범종(梵鐘)은 본래는 대중에게 시간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하여 왔으나 예불시에 범종을 치면서 모든 지옥중생이 이 종소리를 듣고 깨우침을 얻도록 원하게 된 것이다.
'범'이란 바로 우주만물이며 진리이고 맑고 깨끗함이며 한 없이 넓고 크고 좋다는 뜻이다. 종송(鐘誦)을 하는 이유는 미몽에 빠진 중생의 깊은 잠을 깨워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극락세계의 장엄을 일러주고 귀의 발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법고(法鼓)는 불법을 복에 비유하여 법을 설하는 것을 북을 울린다고 한다. 이 말은 부처님의 교법이 널리 세간에 전하는 것을 북소리가 널리 퍼지는데 비유한 것이며 교법이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이 마치 진치고 있던 군대들이 전진하라는 북소리가 울리면 적군을 무찌르는데 비유한 것이다. 또 북을 치는 뜻은 축생들의 영혼을 위하여 법고를 친다고 한다.
목어(木漁)는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생긴 모양을 새겨 그 속이 비게 만들어서 송경할 때와 그 밖의 불사(佛事)에 치는 것이다. 운판(雲板)은 선종에서 제당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공양시간을 알리던 기구이다. 청동으로 구름모양으로 주조하며 운판이라고 이름한다. 또 운판을 치는 뜻은 공중에 있는 고혼과 날아다니는 조류계의 중생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위하여 친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대표적인 의식구 말고도 비슷한 기능으로 쳐서 시간을 알리고자 대중을 모으는 기능으로 사용되는 금고(金鼓), 반자 등도 있으며, 금강령(金剛鈴)과 같은 요령, 목탁, 죽비, 바라, 징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의식에 부처님을 모셔오기 위한 ‘연’인 가마도 의식구에 포함되며, 부처님의 명호를 적어놓는 불패(佛牌) 등도 의식구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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