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화살경>의 핵심은 몸의 접촉으로 인해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몸의 느낌[身受]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心受]은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愚癡無聞凡夫]이거나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多聞聖弟子]이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괴롭다는 느낌[苦受]·즐겁다는 느낌[樂受]·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不苦不樂受]을 일으킨다.
다만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가 느끼는 결과와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느끼는 결과는 다르다.
그러면 범부와 성인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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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27
전경(箭經)
<원문(原文)>
(四七○)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愚癡無聞凡夫生苦[受]․樂受․不苦不樂受, 多聞聖弟子亦生苦[受]․樂受․不苦不樂受. 諸比丘! 凡夫․聖人有何差別?”
諸比丘白佛: “世尊是法根․法眼․法依. 善哉! 世尊! 唯願廣說, 諸比丘聞已, 當受奉行.”
佛告諸比丘: “愚癡無聞凡夫身觸生諸受, 苦痛逼迫, 乃至奪命, 憂愁啼哭, 稱怨號呼.”
佛告諸比丘: “諦聽! 善思! 當為汝說. 諸比丘! 愚癡無聞凡夫身觸生諸受, 增諸苦痛, 乃至奪命, 愁憂稱怨, 啼哭號呼, 心生狂亂; 當於爾時, 增長二受, 若身受․若心受.
“譬如士夫身被雙毒箭, 極生苦痛, 愚癡無聞凡夫亦復如是, 增長二受, 身受․心受, 極生苦痛. 所以者何? 以彼愚癡無聞凡夫不了知故, 於諸五欲生樂受觸, 受五欲樂; 受五欲樂故, 為貪使所使. 苦受觸故, 則生瞋恚; 生瞋恚故, 為恚使所使. 於此二受, 若集․若滅․
若味․若患․若離不如實知; 不如實知故, 生不苦不樂受, 為癡使所使. 為樂受所繫終不離, 苦受所繫終不離, 不苦不樂受所繫終不離. 云何繫? 謂為貪․恚․癡所繫, 為生․老․病․死․憂․悲․惱․苦所繫.
“多聞聖弟子身觸生苦受, 大苦逼迫, 乃至奪命, 不起憂悲稱怨․啼哭號呼․心亂發狂; 當於爾時, 唯生一受, 所謂身受, 不生心受.
“譬如士夫被一毒箭, 不被第二毒箭, 當於爾時, 唯生一受, 所謂身受, 不生心受. 為樂受觸, 不染欲樂; 不染欲樂故, 於彼樂受, 貪使不使. 於苦觸受不生瞋恚; 不生瞋恚故, 恚使不使. 於彼二使, 集․滅․味․患․離如實知; 如實知故, 不苦不樂受癡使不使. 於彼樂受
解脫不繫, 苦受․不苦不樂受解脫不繫. 於何不繫? 謂貪․恚․癡不繫, 生․老․病․死․憂․悲․惱․苦不繫.”
爾時, 世尊即說偈言:
多聞於苦樂, 非不受覺知,
彼於凡夫人, 其實大有聞.
樂受不放逸, 苦觸不增憂,
苦樂二俱捨, 不順亦不違.
比丘勤方便, 正智不傾動,
於此一切受, 黠慧能了知.
了知諸受故, 現法盡諸漏,
身死不墮數, 永處般涅槃.
佛說此經已,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譯文)>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 가란다죽원(迦蘭陀竹園)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도 또한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여러 비구들이여,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께서는 법의 근본이시고 법의 눈이시며 법의 의지처(依支處)입니다. 훌륭하신 세존이시여! 오직 원하옵건대 자세히 설명하여 주소서. 여러 비구들은 그 법을 듣고 나면 받아들여 받들어 행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몸의 접촉으로 여러 느낌이 생겨 고통이 들이닥치고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 우수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원망하며 울부짖느니라.”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해주리라. 여러 비구들이여,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몸의 접촉으로 여러 가지 느낌이 생겨 온갖 고통이 증가하고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 우수에 잠겨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마음이 미친 듯 혼란스러워진다. 그 때 두 가지 느낌을 더하고 자라나게 하나니, 몸의 느낌이거나 마음의 느낌이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士夫]이 몸에 두 개의 독화살을 맞고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으니라.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 이 두 가지 느낌을 더하고 자라게 하여 아주 고통스러워한다. 왜냐하면 저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들은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오욕에 대하여 즐겁다는 느낌과의 접촉을 일으키고 오욕의 즐거움을 누리며, 오욕의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에 탐욕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는다.
괴롭다는 느낌과 접촉하기 때문에 곧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성냄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느낌에 대하여 그것의 발생·그것의 소멸·그것에 맛들임·그것의 재앙·그것에서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고,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하여 즐겁다는 느낌에 얽매여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괴롭다는 느낌에 얽매여 끝내 벗어나지 못하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에 묶여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무엇에 묶이는가?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묶이게 되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에 묶이게 되느니라.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몸의 접촉으로 괴로운 느낌이 생겨 큰 고통이 들이닥치고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더라도 근심과 슬픔으로 원망하거나 울부짖거나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발광하지 않는다. 그런 때를 당해서는 오직 한 가지 느낌만 일으키나니, 이른바 몸의 느낌[身受]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心受]은 일으키지 않느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士夫]이 첫 번째 독화살을 맞고 두 번째 독화살은 맞지 않는 것처럼, 그런 때를 당해 오직 한 가지 느낌만 일으키나니, 이른바 몸의 느낌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은 일으키지 않느니라. 즐겁다는 느낌과 접촉하더라도 탐욕의 즐거움에 물들지 않고, 탐욕의 즐거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그 즐겁다는 느낌에 대해서 탐욕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괴로움과 접촉한 느낌에 대해서도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성냄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 두 가지 번뇌의 발생·소멸·맛들임·재앙·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알고, 사실 그대로 알기 때문에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서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느니라. 그리하여 즐겁다는 느낌에서 해탈하여 묶이지 않고, 괴롭다는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에서 해탈하여 묶이지 않는다. 무엇에 묶이지 않는가?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묶이지 않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에 묶이지 않느니라.”
그 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많이 배운 이라고 해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지각하지 못하는 것 아니네.
그들은 차라리 저 범부들보다
사실은 더 많이 지각하느니라.
즐겁다는 느낌에 방일(放逸)하지 않고
괴로움과 접촉해도 근심 더하지 않으며
괴로움과 즐거움 둘을 함께 버려
따르지도 않고 어기지도 않느니라.
비구는 부지런히 방편을 써서
바른 지혜로 휩쓸리지 않고
이런 모든 느낌에 대해서
총명한 지혜로 분명히 알 수 있네.
모든 느낌을 분명히 알기에
현세(現世)에서 모든 번뇌 다하고
죽은 뒤에도 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반열반(般涅槃)에 머무르게 된다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解釋)>
이 경은 ≪잡아함경≫ 권17 제470경 <전경(箭經)>(T2 p.119c-120b)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36:6 Salla-sutta(SN Ⅳ, pp.207-210)이다. 아가마와 니까야의 내용은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이 <화살경>의 핵심은 몸의 접촉으로 인해 세 가지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몸의 느낌[身受]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心受]은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愚癡無聞凡夫]이거나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多聞聖弟子]이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괴롭다는 느낌[苦受]·즐겁다는 느낌[樂受]·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不苦不樂受]을 일으킨다. 다만 ‘어리석고 배움이 없는 범부’가 느끼는 결과와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느끼는 결과는 다르다. 그러면 범부와 성인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이 경에 의하면, 범부들은 몸의 접촉으로 인해 세 가지 느낌이 생겨 온갖 고통이 증가하고 목숨을 잃을 지경이 되면, 우수에 잠겨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마음이 미친 듯 혼란스러워진다. 그 때 두 가지 느낌, 즉 몸의 느낌이거나 마음의 느낌을 더하고 자라나게 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두 개의 독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범부들은 모든 오욕에 대해 즐겁다는 느낌과의 접촉을 일으키고 오욕의 즐거움을 누리며, 오욕의 즐거움을 누리기 때문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묶이게 되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에 묶이게 된다.
반면 성인들은 몸의 접촉으로 인해 괴로운 느낌이 생겨 큰 고통이 들이닥치고 목숨을 읽을 지경이 되더라도 근심과 슬픔으로 원망하거나 울부짖거나 마음이 혼란스러워져 발광하지 않는다. 그 때에도 오직 한 가지 느낌만 일으킨다. 이른바 몸의 느낌만 일으키고 마음의 느낌은 일으키지 않는다. 마치 어떤 사람이 첫 번째 독화살은 맞았지만 두 번째 독화살을 맞지 않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즐겁다는 느낌과 접촉하더라도 탐욕의 즐거움에 물들지 않고, 탐욕의 즐거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그 즐겁다는 느낌에 대해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즐겁다는 느낌에서 해탈하여 묶이지 않고, 괴롭다는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에서 해탈하여 묶이지 않는다. 이른바 탐욕·성냄·어리석음에 묶이지 않고, 태어남·늙음·병듦·죽음과 근심·슬픔·번민·괴로움에 묶이지 않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아라한 혹은 성인은 아무런 느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비록 아라한일지라도 괴롭다는 느낌·즐겁다는 느낌·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을 일으킨다. 다만 범부들은 괴롭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싫어하고, 즐겁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좋아하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싫어하지도 않고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그 때문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성인들은 괴롭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괴롭다는 느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즐겁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즐겁다는 느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그 때문에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범부들은 몸의 느낌과 마음의 느낌 두 가지를 받지만, 성인들은 몸의 느낌은 받지만 마음의 느낌은 받지 않는다. 마치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이 맞았지만, 두 번째의 화살을 맞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범부들은 오욕을 즐거움이라고 느끼고 좋아하지만, 성인들은 오욕을 괴로움이라고 느끼고 좋아하지 않는다.
·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신행공덕』(불광출판부, 2004),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민족사, 2007), 『사캬무니 붓다』(대숲바람, 2010),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되다』(민족사, 2012)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팔리문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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