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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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Sutta-Nipata)] 해설




숫타니파타(Sutta-Nipata)

해설

 이 책은 《남전대장경(南傳大臧經)》에 수록되어 있는 《숫타니파타Suttanipata》를 완역한 것이다. ‘숫타(Sutta)'는 ’말의 묶음(經)‘, ’니파타(nipata)'는 ‘모음(集)’이란 뜻으로, 두 단어가 합쳐져 ‘말의 모음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숫타니파타는 경전을 모은 것이라는 뜻이다. 불교의 많은 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과 의미가 크다.

 이 경전이 이루어진 배경은 이러하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간추려 간결한 산문의 형태로 묶었다. 암송하기 쉽게 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최초에는 부처님이 즐겨 쓰던 마가다어(북인도 마가다 지방에서 그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됐다)로, 또는 마가다어의 영향력이 큰 속어의 일종으로 구송되다가 그후 팔리어로 정착됐다. 현재는 팔리어 성전聖典(남전대장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경전처럼 시와 짧은 글귀로 결집되어 전해진 또 하나의 경전이 《담마파다Dammapada》, 다시 말해 《진리의 말씀(법구경)》 이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개 아쇼카 왕(기원전 268년에 즉위 232년까지 다스림) 이전에 성립된 것으로 보는데, 그 중에서도 숫타니파타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제4장 ‘여덟 편의 시’와 제5장 ‘피안에 이르는 길’은 다른 장보다도 더 일찍 이루어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평가한다. 물론 맨 처음부터 숫타니파타(經集)로 한데 묶여 형성된 것은 아니다. 각 장이 따로따로 독립된 경전으로 전해지다가 어떤 시기에 와서 하나의 ‘경집經集‘으로 묶여진 것이다. 여승女僧에 대한 말이 한 마디도 없는 걸 보아도 이 경전이 가장 초기의 불교 형태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숫타니파타》는 모두 1,149수의 시를 70경에 정리, 이것을 다섯 장으로 나누고 있다. 그 다섯 장이 ‘뱀의 비유(蛇品)’ 작은 장(小品)‘ ’큰 장(大品)‘ ’여덟 편의 시(義品)‘ ’피안에 이르는 길(彼岸道品)‘로 이 중에서 ’여덟 편의 시‘와 ’피안에 이르는 길‘ 등 세 장은 처음에는 독립된 경전으로 유포되었던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이다.

 첫째, ‘뱀의 비유’는 열두 개의 경으로 되어 있다. 그 중 제1경에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라는 구절이 되풀이 되어 있어 사경(蛇經)이라고 부른다. 제2경은 소치는 다니야 대목으로 16편의 시구로 된 경이다. 제3경에는 독신수행자를 위해 모든 집착을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유명한 구절의 반복이 있다.

 둘째, ‘작은 장’은 비교적 짧은 경 열네 개를 담고 있다. 제11경은 8편의 시로 되어 있고, 부처님의 아들인(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 라훌라를 위해 말씀하신 부분이다. 부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함께 있는 승단의 선배들을 가볍게 보거나 교만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는가 하면, 다시는 세속에 돌아가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셋째, ‘큰 장’에는 상당히 긴 열두 개의 경이 실려 있다. 제1 ‘출가경’ 제2 ‘정진경’ 제11 ‘나라카경’ 등 세 경은 부처님의 전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다. 제9 ‘비셋타경’에서는 출신 성분에 의해 바라문(제 1 계급)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하는 행위에 의해 바라문도 될 수 있고 천민도 될 수 있다고, 사성(四姓) 평등의 이치를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제 12 ‘두 가지 관찰’은 소박한 형식으로 모든 사물의 기원이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넷째, ‘여덟 편의 시’는 전부 여덟 편의 시로 이루어진 경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두 번째의 ‘동굴’과 세 번째의 ‘분노’등은 여덟 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일찍부터 16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한역 《의품경(義品經)》은 바로 이 경이다.

 다섯째, ‘피안에 이르는 길’은 앞의 경전들과는 달리 전체가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열여섯 바라문들이 한 사람씩 부처님께 물으면 대답해 주는 문답식 16절과 서(序)와 결(結)을 합해 18절로 되어 있다.

 팔리어로 된 성전 중에는 수 많은 숫타가 있는데 하필 이 경만을 ‘경집‘이라 부른 까닭은, 다른 경전에는 그 나름의 특정한 이름이 있지만 이 경에는 그러한 이름이 없어 경집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경집에는 《닛데사 (Niddesa)》라는 오래된 주석서가 붙어 있다. ‘닛데사’는 ‘의미의 해석’이란 뜻이다. 이 주석서는 4장과 5장, 그리고 1장 제3경에 대한 주석이다. 이 닛데사의 성립시대인 아쇼카 왕 시대에는 아직도 경집 전체가 정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경전은 다섯 장 중에서 제4장만 일찍이 한역되어 대장경(한문으로 번역된 것을 말함) 안에 수록되었고 전체의 번역은 없었다. 한역은 《불설의족경(佛說義足經)》 두 권인데, 쿠샤나 왕조(1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에 걸쳐 융성했던 인도의 통일 왕조) 치하 서북 인도의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지겸(支謙)이 중국에 와서 오(吳)나라 초기(223~253)에 번역한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한역 불교권에서 이 경전이 알려지지 않았던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어떤 경전보다도 최초에 성립되고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서의 부처, 그 육성에 가까운 원초적인 설법임에도 우리에게 일찍이 소개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언어의 장벽에만 그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소승불교라 해서 무조건 얕잡아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던 중국적인 배타성과 아집에 있었던 것이다. 초기 불교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없이 대승 불교에 접근했던 그 결과는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현상을 낳았고, 오늘날 승단의 혼미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숫타니파타》 가운데는 발전, 수정되기 전의 소박하고 단순한 초기의 불교가 그대로 심어져 있다. 여기서는 후기에 이루어진 경전처럼 현학적이고 번거로운 교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부처님은 그와 같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인간으로서 가야 할 길을, 모순과 갈등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에서 해탈의 저 세계(彼岸)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신 것이다. 진리란 간단 명료한 것임을 우리는 이 경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을 읽는 독자들은 그 단순한 형식이 먼저 눈에 띌 것이다, 어떤 때는 지루하리만큼 같은 말이 반복되기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초기 경전의 소박한 형태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절마다 눈을 뜬 사람의 인간미가 배어 있는 점에 주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은 후기 경전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가르침을 듣고자 찾아와 묻는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피안에 이르는 길을 차근차근 말씀하신 것이다.

 이 경전의 중요한 부분은 본래 운문인 시의 형식으로 되어, 읽히기보다는 읊어졌다. 시가 지닌 아름다움을 언어의 구조가 다른 말로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아예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데 치중해 한결같이 산문으로 옮겼다. 그러면서도 이 경전이 지니고 있는 의도적인 표현만은 다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대승 경전만을 읽다가 이 경에서 풀어 쓴 듯한 용어를 만나면 오히려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불교 용어로 굳어진 것은 후기의 일이고, 초기에는 단순한 표현으로 썼다는 것을 이 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용어로 굳어지기 이전의 용어가 접근하기 쉬울 것 같아 본래의 표현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결한 주를 달았다.

 이 경에 대한 번역본이 유럽에서는 19세기 이래 여러 차례 출간되었는데, 그 중 자주 인용되는 것만 하더라도 3종의 영역(英譯)과 2종의 독역(獨譯)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5종의 번역이 있는 걸로 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자의 번역으로 《한글대장경》에 수록 소개된 바 있고, 정음문고(正音文庫)로도 펴낸 적이 있다. 번역의 대본은 《남전대장경》을 사용했고,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교수의 번역에 힘입은 바 컸음을 아울러 밝힌다.

 끝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미리 당부할 말이 있다. 모든 경전이 다 그렇듯이 지혜의 책인 이 경전도 소설이나 일반 산문과는 달리 흥미 있는 글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몇 구절씩 음미하듯 읽어 가면서 현재 자기 자신의 삶을 ‘이 거울’에 비춰 본다면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의 지평이 열릴 줄 믿는다. 그리고 이 경전을 읽어 가는 동안 순수한 초기 불교의 모습과 그 무렵 종교와 사상계의 흐름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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