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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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의심한 파세나디 왕


▲ 말리카 왕비의 설득으로 부처님을 만나러 간 파세나디 왕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자신이 다스리는 코살라 왕국의 속국 카필라의 석가족 출신이라는 것을 안 그는 왕으로써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화려하게 장식한 하얀 코끼리를 타고 기원정사로 향했다. 부처님과 만난 파세나디 왕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너무나 젊은 부처님의 모습에 의심을 품었고 예를 갖추는 대신 ‘정말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가 맞느냐’고 묻는다.

2016년 06월 01일 (수)

 부처님 당시 인도는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왕국이 분열되어 있었다. 따라서 왕국 간에는 정복전쟁이 수시로 일어났고 작은 나라는 멸망을 피하기 위해 큰 나라에 속국이 되기도 하였다. 부처님이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을 하셨던 바라나시는 옛 카시 왕국의 수도였다.

인도의 남쪽과 북쪽을 연결하는 주요 지역에 자리한 카시 왕국은 한 때 큰 번영을 누렸으나 맹렬하게 영토를 확장해가던 코살라 왕국의 영웅 마하 코살라 왕에 의해 멸망하였다. 카시 왕국을 정복한 코살라 왕국은 북인도의 강대국으로 떠올랐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속국을 자처하며 친교를 맺었다. 그 작은 나라 중 하나가 바로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 왕국이다.



북인도의 강대국, 코살라 왕국

 코살라 왕국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카필라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받아들일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출가 후 부처님은 계속하여 남쪽으로 내려갔고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가하(왕사성)을 거쳐 바라나시에서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그 후 중생제도의 길을 선택하신 부처님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사르나트의 녹야원을 찾았다.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바른 법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명의 수행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부처님께 귀의한다. 그리하여 녹야원은 부처님의 법문이 처음으로 설해진 곳이자 불법승 삼보(三寶) 즉, 부처님과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 그리고 스님이 탄생한 장소가 되었다. 이어서 부처님은 빔비사라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라자가하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가섭 3형제를 차례로 교화하였고 가섭 3형제와 그들을 따르던 1천 명의 제자들은 부처님께 귀의한다. 라자가하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 곁에는 천 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었다.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환영하며 교단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를 기증한다. 부처님은 죽림정사에서 연달아 세 번의 안거를 보내셨고 빔비사라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귀의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부처님은 고향을 찾지 않으셨기에 카필라 왕국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코살라 왕국에도 부처님의 발걸음은 아직 닿지 않고 있었다.



수닷타 장자와의 만남과 기원정사의 건립

 부처님이 코살라 왕국에 가게 되신 것은 깨달음을 얻으신 후 10년이 훨씬 지난 후였다. 그 사이 부처님은 이미 고향 카필라를 몇 차례 방문하셨고 그때마다 이복동생 난다와 친아들 라훌라를 비롯하여 석가족의 여러 왕자들이 출가를 하였다. 석가족 왕자들의 출가는 세간의 화제가 되었으나 그때까지도 코살라 왕국에는 부처님의 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코살라 왕국의 영웅 마하 코살라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파세나디 왕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부처님의 바른 법이 코살라 왕국에 퍼질 기회가 찾아왔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머무르고 계실 때였다. 코살라 왕국의 대부호였던 수닷타 장자가 사업차 라자가하에 왔다가 자신의 여동생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다. 오랜 만에 여동생 부부의 집을 찾은 수닷타 장자는 그들이 당연히 최고의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동생 부부는 그를 환대하기는커녕 연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매부는 손수 방석의 먼지를 하나하나 털어 손님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고 여동생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하인들에게 시켜놓고 확인만 했는데, 허드렛일까지 직접 하는 것을 보면서 무안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 수닷타 장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도대체 누구를 초대했기에 이토록 정성껏 연회를 준비하는지 물었다.

 “내일은 부처님과 제자분들이 공양을 하기 위해 오시는 날입니다.”

 여동생의 대답을 들은 수닷타 장자는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이 계시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내일이면 부처님께서 여동생 부부의 집을 방문하신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부처님을 한시라도 빨리 뵙고 싶은 마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성이던 수닷타 장자는 그날 밤 죽림정사로 가는 정원 안에서 부처님을 만났다. 이미 수닷타 장자가 올 것을 아신 부처님은 그를 다정히 맞아주셨고 법문을 들려주셨다. 부처님과의 첫 만남에서 수닷타 장자는 수다원 과를 성취하였고 교단에 귀의하였다. 다음 날, 제자들과 함께 여동생 부부의 집으로 오신 부처님께서 공양을 하시고 법문을 마치시자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 앞에 나아가 간청했다.

 “부처님이시여, 부디 스라바티(사위성)에 와서 가르침을 들려주십시오.”

 수닷타 장자의 간곡한 청을 들은 부처님은 마침내 스라바티에 가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때 수닷타 장자는 자신이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갈 때 부처님의 제자 한 분이 동행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코살라 왕국은 아직 부처님의 법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부처님과 스님들이 함께 머물 사원을 지으려면 어떤 장소가 좋을지, 어떤 형태로 건물을 만들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상수제자인 사리불 존자에게 수닷타 장자와 동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스라바티에 도착한 후 사리불 존자와 함께 부처님과 스님들이 조용히 머물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그곳에 사원을 세웠다. 이 사원이 바로 기원정사로 이곳에서 부처님은 가장 오랫동안 안거를 보내셨고 가장 많은 법문을 설하셨다.



부처님을 기다린 비사카

 마침내 기원정사가 완공되자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스라바티로 향했다. 이때 부처님께서 코살라 왕국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뛸 듯이 기뻐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비할 바 없는 보시’로 명성을 떨친 비사카와 말리카 왕비였다. 라자가하 최고의 부호 멘다카의 손녀인 비사카는 어린 소녀 시절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다원 과를 성취한 총명하고 선근이 깊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멘디카는 일찍이 부처님께 귀의한 후 부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하여 공양을 올린 뒤 법문을 듣곤 하였는데 이때 비사카는 어깨너머로 법문을 들으며 신심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다난자야를 따라 코살라 왕국의 무역도시 사케타로 이주하였고 그 후 부처님을 뵙기는 어려웠다.

 사실 비사카가 부처님이 계신 라자가하를 떠나게 된 것은 마가다 왕국과 코살라 왕국의 동맹을 위해서였다. 왕자 시절, 탁실라에서 유학을 했던 파세나디 왕은 다양한 국가의 왕자들과 바라문들, 상인들과 교류를 하며 외교적 감각을 쌓았고 학문을 두루 섭렵하며 코살라 왕국의 번영에 대한 계획을 세워놓은 준비된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군사와 행정을 정비하고 재정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무엇보다 무역과 상업의 활성화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빔비사라 왕에게 라자가하의 대부호, 멘

다카의 아들 다난자야를 사케타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난자야가 이주를 하게 되면 그가 하고 있는 사업의 대부분이 사케타로 이동하게 되므로 교역이 활발해질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빔비사라 왕은 다난자야가 라자가하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라의 재원을 빼앗기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파세나디 왕은 다난자야가 사케타로 이주하는 조건으로 빔비사라 왕의 누이동생을 왕비로 맞았다. 이로써 두 나라의 동맹은 더욱 견고해 질 수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사케타로 이주했던 비사카는 혼기가 차자 미가라의 아들과 혼인하여 스라바티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시댁 식구들은 모두 외도를 믿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처님께서 스라바티에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니 비사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부처님과 재회한 말리카 왕비의 기쁨

 한편 파세나디 왕에게는 빔비사라 왕의 누이동생 외에도 기타 태자의 어머니인 와르시카 왕비를 비롯하여 명문가 출신의 웁비리 등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다. 하지만 왕궁의 수많은 미녀들과 왕비들 중에서 그가 가장 총애한 여인은 바로 쟈스민 정원을 돌보던 노예 출신의 말리카 왕비였다. 말리카 왕비는 비록 얼굴이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온화한 성품과 총명함으로 파세나디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매우 독실한 불제자였다.

 말리카 왕비는 과거 쟈스민 정원의 노예로 있던 시절 늘 고된 일과 배고픔에 시달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수행자를 보게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극진한 마음이 생겨 가지고 있던 도시락을 공양으로 바친 적이 있었다. 그 도시락은 그녀가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공양을 받은 수행자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씨를 칭찬해주었다. 바로 그 날 말리카는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고 정원에 들어온 파세나디 왕과 만났고 그가 왕인지 모른 채 정성껏 시중을 들어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말리카는 하루아침에 노예에서 왕비가 되었다.

 말리카가 도시락을 바친 수행자는 바로 부처님이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고 독실한 불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부처님이 스라바티에 오셔서 기원정사에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말리카 왕비의 기쁨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을 의심한 파세나디 왕

 파세나디 왕의 허락을 받고 기원정사를 방문한 말리카 왕비는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수행자와 똑같은 모습을 한 부처님을 뵙자 크게 감격하여 예배를 올렸다. 그 후 왕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파세나디 왕에게 부처님을 뵐 것을 권하였다. 파세나디 왕은 말리카 왕비가 원하는 것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다 들어줄 만큼 그녀를 총애하였으나 부처님을 뵈러 가는 것만은 좀처럼 내키지가 않았다. 그러자 말리카 왕비는 지혜를 발휘하여 파세나디 왕을 설득하였다. 부처님을 먼저 찾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며 오히려 일국의 왕으로써 현명함과 넓은 아량을 많은 백성들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말리카 왕비의 설득은 결국 파세나디 왕의 마음을 움직였다.

 부처님을 뵈러 가기 전 파세나디 왕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황금으로 장식한 안장을 올린 하얀 코끼리와 커다란 일산으로 왕으로써의 위엄을 한껏 드높이며 기원정사로 향했다. 마침내 부처님 앞에 섰을 때 파세나디 왕의 마음에는 존경심이 아닌 불쾌함과 의심이 가득 차올랐다. 눈앞에 있는 수행자는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왕의 신분을 무릅쓰고 일부러 그를 만나러 왔음에도 전혀 일어나 맞이하는 기색이 없었다. 파세나디 왕은 예배를 하는 대신 고개를 꼿꼿하게 든 채 부처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심을 가감 없이 입 밖으로 꺼냈다.

 “당신이 바로 온 스라바티에 소문이 자자한 고타마로군요.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라고 인정하십니까?”

 부처님을 거침없이 석가 족의 성씨인 ‘고타마’라고 부르는 파세나디 왕의 표정에는 오만함이 가득했다.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 왕국이 그가 다스리는 코살라 왕국의 속국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의식하고 던진 물음이었다. 파세나디 왕의 말과 행동에 스님들은 잔뜩 긴장하였고 기원정사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나는 가장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였고 이를 사실대로 말합니다.”

그러자 파세나디 왕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수행자들을 많이 만나보았고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당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수행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을 부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들보다 나이도 훨씬 젊고 수행자로 지낸 시간도 짧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스스로를 부처라고 자신하는 것입니까?”






▲ 파세나디 왕과 말리카 왕비의 다정한 모습.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부처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여쭤보게 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말씀하시며 “자기 자신을 소중히 하는 사람만이 남을 해치지 않는다”라는 명쾌하고 감동적인 법문을 들려주신다.

2016년 07월 01일 (금)

 파세나디 왕이 다스리는 코살라 왕국은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 왕국을 속국으로 둔 강대국이었다. 게다가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과 나이가 같았다. 그는 카필라의 왕자였던 싯다르타가 출가 수행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지만 부처가 되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다.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총애하던 케마 왕비의 출가를 허락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부처님께서 코살라 왕국의 대부호 수닷타 장자의 초청을 받아 제자들과 함께 스라바티(사위성)에 오셨다. 이에 파세나디 왕은 수행자를 존중하는 군주로써의 위엄과 덕행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행렬을 갖추고 기원정사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갔다.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이 생각보다 젊은 모습에 깜짝 놀랐다. 저토록 젊은 수행자가 과연 부처인가 의심이 든 그는 부처님께 진정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참으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작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네 가지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는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을 지라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어린 왕자와 독사와 불씨 그리고 출가 수행자입니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궁금증으로 눈이 커진 파세나디 왕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지금은 어리고 힘이 없는 왕자라 할지라도 언젠가 왕이 될 수 있기에 그를 무시할 수 없으며, 아무지 작은 뱀이라도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을 품고 있을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며, 입김으로 끌 수 있는 작은 촛불도 커지면 산과 들, 마을과 도시를 삼켜버릴 수 있기에 방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막힘없는 답변에 파세나디 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또한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는 언젠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무시한 채 수행자를 헐뜯고 비방한다면 그 죄업으로 온갖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법문을 마친 부처님은 게송으로 다시 한 번 이를 들려주셨다. 부처님이 게송을 마치셨을 때 거드름피우던 파세나디 왕은 어느 새 공손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부처님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였고 그 후로도 마음속에 의문이 생길 때마다 부처님을 찾아와 조언을 구했다. 파세나디 왕의 질문은 너무나 세속적이면서도 인간적이어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공감을 주곤 한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파세나디 왕의 아내 말리카 왕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말리꽃 정원의 노예였던 그녀는 자신이 먹을 점심을 부처님께 보시한 공덕으로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처음에는 자신이 공양을 올린 수행자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몰랐던 말리카 왕비는 훗날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 후 말리카 왕비가 부처님께 귀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위가 낮은 노예 출신이었고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지만 겸손함과 지혜로움으로 파세나디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파세나디 왕이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배경에는 말리카 왕비의 노력이 컸다.

 어느 날 밤, 파세나디 왕은 말리카 왕비와 함께 왕궁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순종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깊은 만족과 함께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감상에 젖은 파세나디 왕은 분위기에 취해 말리카 왕비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말리카여! 그대에게 그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누구인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파세나디 왕의 속마음은 말리카 왕비에게서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듣는 것이었다. 그는 말리카 왕비가 ‘왕이시여,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저의 주인이신 당신입니다.’라고 말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파세나디 왕의 품에 안겨있던 그녀는 질문을 듣자 몸을 일으킨 후 말간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제게 제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파세나디 왕은 처음에는 깜짝 놀랐고 그 다음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가난한 노예에 불과했던 말리카를 지금의 왕비로 만들어 준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이제는 지난날을 다 잊은 채 오만해진 것인가? 혹시라도 후궁들 사이에서 무시를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그녀를 총애해준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인가? 찰나의 순간 파세나디 왕의 머릿속에는 온갖 의문이 스쳐갔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말리카 왕비가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대왕이시여! 대왕께는 누군가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파세나디 왕은 말리카 왕비를 향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 말리카여! 나 역시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사람은 없다.”

 대답은 했지만 곱씹을수록 가슴 속의 답답함은 오히려 커졌다. 다음 날 파세나디 왕은 기원정사에 계신 부처님을 찾아가 지난 밤 왕비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는 동안 왕비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그의 마음은 어느덧 차분해졌다. 파세나디 왕의 이야기가 끝나자 부처님께서는 그를 바라보며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옳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파세나디 왕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아시고 이어서 게송을 들려주셨다.

 “동서남북 사방에 마음을 다 기울여 돌아다닌다 해도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파세나디 왕은 그때서야 말리카 왕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왕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확인한 파세나디 왕은 즐거운 마음으로 궁으로 돌아갔다. 비록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의 게송을 통해 왕비의 사랑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으나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게도 큰 울림을 준다.



공양 초청을 무시당한 파세나디 왕의 분노

 매일 오전 수닷타 장자의 집과 비사카의 집은 공양을 하러 오신 스님들로 가득했다. 때로는 부처님도 이 자리에 함께하곤 하셨다. 이들은 기쁘게 부처님과 스님들께 음식을 올리고 법문을 청해 들었다. 그들의 집은 늘 화기애애하였고 충만한 신심으로 가득했다. 부처님이 계신 날에는 마치 축제가 벌어진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공양이 끝나면 질서정연하게 법문을 들었다.

이런 모습이 은근히 부러웠던 파세나디 왕은 자신도 왕궁에서 날마다 500명의 스님들께 공양을 보시하겠다고 청했다. 파세나디 왕의 공양은 처음에 무척 잘 진행되었다. 그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부터 법회자리를 마련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세심하게 챙겼다. 하지만 종종 다른 업무로 인하여 공양을 준비하라고 명하는 것을 깜빡 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 왕궁으로 공양을 간 스님들은 빈 발우를 든 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사소한 잘못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신하들에게 가장 절대적인 것은 왕의 명령이었다. 왕의 명령 없이 ‘눈치껏 알아서’ 업무를 처리할 경우 나중에 불호령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파세나디 왕이 직접 명령을 하지 않는 날은 적극적으로 맡아서 공양을 준비하는 신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스님들은 점차 왕궁으로 공양을 가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세나디 왕은 아침 회의가 일찍 끝나자 기분 좋게 공양을 올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스님들이 자신의 공덕을 찬탄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신하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텅 비어 있었고 준비된 500인분의 음식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텅 빈 식당을 본 순간 파세나디 왕의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기원정사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처님을 향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처님, 제자는 날마다 500분의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겠다고 청하였고, 부처님께서는 이를 수락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는 날마다 500명분의 음식을 충분히 갖추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스님들은 아무도 오시지 않고 음식은 그대로 남아 상하기 직전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자의 공양을 받고자 하는 스님이 정녕 한 분도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

말을 할수록 파세나디 왕은 점점 화가 났다. 스님들이 자신을 모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스님들이 파세나디 왕의 공양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또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는 줄 알고 갔다가 굶고 온 스님들이 많다는 것도 아셨다. 분노에 찬 파세나디 왕을 보면서 부처님은 왕궁으로 공양을 가지 않은 스님들에게 허물을 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스님들이 왕궁에 가지 않은 것은 왕궁의 초청을 무시하여서가 아닙니다. 다만 스님들이 아직 대왕을 어렵게 생각하고 친밀하지 않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파세나디 왕의 분노를 순식간에 녹여주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스님들이 임금인 자신을 어려워하는 바람에 감히 왕궁에 오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면서 스님들께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왕궁으로 돌아간 파세나디 왕은 어떻게하면 스님들이 자신을 좀 더 친근하게 여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비두다바의 출신을 비하하며 그가 앉았던 자리에 우유를 부어 닦아내는 석가족의 모습. 카필라 왕국을 처음 방문한 비두다바는 그 모습을 목격하고 크게 충격을 받는다. 자신을 무시하는 석가족에게 모멸감과 분노를 느낀 비두다바는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2016년 08월 01일 (월)

 부처님께 귀의한 뒤 파세나디 왕은 수시로 기원정사를 찾아 법문을 듣곤 했다. 기원정사는 천 명이 넘는 스님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고요하고 가지런한 질서가 느껴졌다. 수많은 재가신도들이 모여서 법문을 들을 때에도 소란은커녕 부처님의 목소리는 사자후처럼 울려퍼졌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빛이 흘렀다. 승가의 모든 모습과 부처님의 존재는 파세나디 왕의 뇌리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왕으로써의 화려한 생활과 정치적인 업무로 항상 머리가 복잡했던 파세나디 왕은 기원정사를 찾을 때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부처님을 너무나 존경하고 승가를 항상 찬탄의 눈으로 바라보던 파세나디 왕은 어느 순간 부처님과 좀 더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품게 되었다.


부처님의 친족에게 청혼을 하다

 파세나디 왕은 어떻게 하면 부처님과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승가의 스님들이 자신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파세나디 왕은 군주로써의 위엄과 권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작은 말실수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도 조언을 구할 때 깍듯하게 예를 갖췄고 왕의 앞에 있을 때에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는 파세나디 왕에게 매우 오래되고 익숙한 일상이었다.

따라서 승가의 스님들이 친근하고 다정하게 그를 대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과 더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승가와도 보다 각별한 관계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방적인 감정이자 다소 과하다고 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파세나디 왕은 결코 마음을 돌리지 않았고 긴 고심 끝에 마침내 ‘자신의 뜻에 맞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과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는 그보다 먼저 부처님께 귀의했으며 왕비까지 출가시켰던 빔비사라 왕조차 갖지 못한 특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진 파세나디 왕은 곧바로 높은 지위의 신하들로 사신단을 선발하여 카필라 왕국에 보냈다. 석가족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하기 위해서였다.



혈통을 중시한 석가족의 교만

 코살라 왕국은 부처님의 고향 카필라 왕국을 속국으로 둔 상전국이자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의 체면을 생각하여 정중하고 깍듯하게 예를 갖춘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그는 분명 카필라 왕국에서도 이 혼인을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작은 나라인 카필라 왕국에게 훨씬 이로운 점이 많은 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세나디 왕이 한 가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카필라 왕국을 다스리는 석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스스로를 태양의 후예라고 부르는 석가족은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칠 정도로 강했다. 카필라 왕국을 세운 왕자들은 신하들이 혼인을 권하자 ‘혈통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여동생인 공주들을 아내로 맞았고 대대로 석가족 안에서 혼인을 고집해왔다. 석가족에게는 정략결혼을 통해 주변국이나 강대국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번영을 도모하는 것보다 혈통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파세나디 왕의 사절단이 왕궁에 도착했을 때 석가족의 마하나마 왕은 미소로 그들을 맞아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파세나디 왕이 석가족 공주 한 명을 왕비로 맞기를 원한다는 말이 나오자 마하나마 왕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담담한 척 했으나 속으로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파세나디 왕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고, 진짜 공주를 그에게 보내서 석가족의 혈통을 더럽힌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종의 딸 바사바캇티야, 가짜 공주가 되다

 한편 코살라 왕국 사신단의 이야기를 들은 석가족 장로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따로 모였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결코 혈통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혈통이 더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이유로 혼인을 거절할 경우 파세나디 왕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카필라 왕국의 군사력은 코살라 왕국과 감히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최악의 경우, 모욕을 참지 못한 파세나디 왕이 전쟁을 선언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카필라 왕국의 멸망은 불 보듯 뻔했다.

 그때였다. 마하나마 왕의 머릿속에 갑자기 바사바캇티야가 떠올랐다. 바사바캇티야는 그와 노예 출신 시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그녀는 비록 왕의 딸이었으나 어머니 쪽의 신분과 혈통이 낮다는 이유로 왕궁에서 시녀로 지내고 있었다. 마하나마 왕은 서둘러 사신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바사바캇티야를 불렀다. 마침 그녀는 혼인 적령기의 아름다운 처녀였다. 바사바캇티야를 본 마하나마 왕과 석가족 장로들은 순식간에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한 마디 소란도 없이 바사바캇티야를 가짜 공주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석가족 여인들은 바사바캇티야를 내궁으로 데려가 화려한 보석과 비단으로 치장해주었다. 치장을 마치고 나자 바사바캇티야의 겉모습은 진짜 공주처럼 보였다. 이어서 석가족 장로들은 그녀를 마하나마 왕과 사신단 앞으로 데려갔다. 마하나마 왕은 사신단에게 바사바캇티야가 공주라고 소개했고 식사시간이 되자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뒤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사신단은 바사바캇티야가 공주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석가족은 신분이 다른 사람과는 절대로 겸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두 사람은 같은 상에 앉아서 거짓으로 음식을 먹는 척만 했을 뿐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석가족의 주도면밀한 계획 덕분에 진실을 보지 못한 사신단은 바사바캇티야를 진짜 공주라고 생각하였고 그녀의 아름다움과 얌전하고 우아한 모습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마하나마 왕의 환송을 받으며 그녀를 코살라 왕국으로 모셔왔다. 사신단의 모습이 사라지자 석가족 장로들과 여인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짜 공주를 내세워 혈통을 잘 지킨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층 더 교만해졌다.



외가 친척들에 대한 의문을 갖다

 바사바캇티야를 본 파세나디 왕은 매우 흡족하였고 성대한 결혼식을 치른 뒤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사바캇티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파세나디 왕은 카필라 왕국에 사신단을 보내 태어난 왕자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부처님과 석가족을 존중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혈통이 아닌 석가족의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바사바캇티야를 진짜 공주라고 생각한 적이 없던 마하나마 왕에게 그녀의 아들은 천한 피가 섞인 갓난아기일 뿐이었다. 사신단의 부탁을 받은 마하나마 왕은 마지못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성의 없이 ‘비두다바’라고 중얼거렸다. 왕의 아들로 태어난 아기는 그렇게 아버지 쪽의 이름도, 어머니 쪽의 이름도 아니며 아무 뜻도 없는 ‘비두다바’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록 석가족에게는 변변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비두다바는 파세나디 왕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그가 일곱 살이 되던 해, 비두다바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왕궁의 많은 다른 왕자들은 모두 생일이나 명절 때면 외가에서 받은 선물을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비두다바는 한 번도 카필라 왕국에서 온 선물을 받은 적이 없었다. 보내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다른 왕자들과 어울려 놀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비두다바는 바사바캇티야에게 달려가서 왜 자신의 외가 친척들은 선물을 보내지 않느냐고 물었다. 차마 어린 아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바사바캇티야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카필라 왕국에 계시다. 그곳은 여기서 아주 먼 곳이기 때문에 매번 선물을 보내주시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너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부처님과 같은 혈통이니 기죽을 것 없다.”

 어머니의 대답을 들은 비두다바는 신이 난 얼굴로 돌아갔다. 하지만 바사바캇티야의 마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진실이 밝혀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뒤, 그녀의 불안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16살이 된 비두다바가 자신이 직접 카필라 왕국을 방문하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겠다고 청한 것이다.



비두다바와 석가족의 첫 만남

 비두다바는 금 꽃가지와 은 꽃가지를 갖추고 화려하고 위풍당당한 행렬을 꾸려 카필라 왕국으로 향했다. 비두다바가 출발하기 전, 바사바캇티야는 발이 빠른 사람을 보내 마하나마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비두다바 왕자의 방문은 그 동안 파세나디 왕이 베푼 모든 선의를 속이고 기만했던 석가족이 자신들의 교만과 잘못을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석가족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끝내 걷어차고 말았다. 역시나 혈통에 대한 결벽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외가 친척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카필라 왕국에 도착한 비두다바는 어색한 환대를 받으며 마하나마 왕과 그의 왕비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어서 그는 석가족의 모든 어른들에게 계속하여 인사를 올려야 했다. 비두다바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 위해 그보다 나이가 어린 왕자와 공주들은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비두다바는 엄연히 상전국의 왕자였지만 카필라 왕국에 머문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인사를 올려야만 했다. 그러나 호의를 가지고 외가를 방문한 그의 인사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친절하게 왕궁을 안내해주거나 먼저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없었다.

 처음에 비두다바는 자신을 어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전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홀로 왕궁을 돌아다니던 비두다바가 우연히 석가족 장로들이 나라의 일들을 의논하는 회의장을 구경하고 나왔을 때였다. 이어서 들어간 석가족 장로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천한 노예의 자식 주제에 감히 이곳에 발을 들이다니, 이곳이 그 종년의 자식이 앉았던 자리로군.”

 비두다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놀란 비두다바가 다시 회의장에 들어갔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우유를 부어 몇 번이나 닦아내고 있는 석가족 장로의 모습이었다.



증오의 씨앗이 싹트다

 결국 비두다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고 왜 석가족이 자신을 어색하게 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분노한 비두다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증오어린 눈으로 카필라 왕국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왕이 되면 가장 먼저 너희 석가족을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오늘 너희는 내가 앉았던 자리를 우유로 씻어냈으나 나는 그 자리를 석가족의 피로 씻어낼 것이다.”

 코살라 왕국으로 돌아온 뒤 석가족을 향한 비두다바의 증오는 점점 커져갔다. 게다가 진실을 알게 된 파세나디 왕은 분노하여 바사바캇티야와 비두다바의 신분을 노예로 강등시켰다. 비두다바가 노예의 핏줄이라는 것은 이제 온 나라 백성들이 다 알게 되었다.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기원정사로 달려온 파세나디 왕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어머니의 혈통이나 신분보다 아버지의 신분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법문을 들려주셨다. 파세나디 왕이 가장 사랑한 왕비, 말리카 역시 노예 출신이 아니던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안정을 찾은 파세나디 왕은 다시 바사바캇티야와 비두다바의 신분을 예전대로 돌려주었다. 하지만 석가족에 대한 비두다바의 원한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 파세나디 왕은 아들 비두다바 왕자의 반란을 피해 낡은 수레 한 대에 의지하여 마가다 왕국으로 도망쳤다. 늙은 몸을 이끌고 국경지역에 도착한 파세나디 왕은 결국 그날 밤, 괴로움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왕으로써 참으로 비참하고 초라한 죽음이었다.


2016년 09월 01일 (목)

 비두다바는 파세나디 왕과 석가족 출신의 바사바캇티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였다. 파세나디 왕은 바사바캇티야가 석가족 공주라고 생각하여 그녀를 왕비로 맞았고 총애를 내렸다. 하지만 사실 바사바캇티야는 마하나마 왕과 시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공주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시녀였던 어머니처럼 낮은 신분이었다. 석가족은 혈통의 순수함을 지키는 것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마하나마 왕은 파세나디 왕에게 진짜 공주를 보내는 대신 바사바캇티야를 양녀로 삼아 공주로 신분을 바꾼 것이었다.

파세나디 왕과 비두다바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중 외가인 카필라 왕국을 방문한 비두다바는 석가족으로부터 노골적인 멸시와 모욕을 받았고 결국 자신의 출생과 신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비두다바는 석가족을 향한 증오와 분노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충신 반둘라 총사령관과 그의 아들들

 석가족의 거짓말에 분노한 사람은 비두다바 뿐만이 아니었다. 파세나디 왕 또한 화가 난 나머지 바사바캇티야와 비두다바의 신분을 서민으로 강등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파세나디 왕은 부처님을 지극히 공경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두 사람의 신분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한 번 깨진 신뢰를 다시 되돌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파세나디 왕은 한 가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

코살라 왕국은 북인도의 강대국으로 전쟁을 통해 많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코살라 왕국이 정복 전쟁에서 매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반둘라 총사령관의 힘이 컸다. 반둘라 장군은 본디 말라 왕국 출신으로 그가 코살라 왕국의 총사령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엄청난 공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반둘라 장군은 같은 말라 왕국 출신의 여인과 혼인을 하여 무려 32명의 아들이 있었다. 반둘라 장군의 아내는 총 16번 출산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아들 쌍둥이를 낳았던 것이다.

반둘라 장군의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를 닮아 체격이 건장하고 용맹할 뿐 아니라 무예와 담력이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비며 많은 공을 세웠다. 반둘라 총사령관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명성은 코살라 왕국 전역에 널리 퍼졌고 이들을 두려워한 많은 나라들은 감히 전쟁을 할 엄두를 내지 않았다. 코살라 왕국에는 많은 장군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이름은 바로 ‘반둘라’였다.



파세나디 왕의 잘못된 결정

 코살라 왕국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반둘라 총사령관은 뛰어난 능력 덕분에 법무대신의 직위까지 맡게 되었다.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사람은 종종 뇌물을 받기도 했고 이에 따라 공정하지 못한 판결을 내릴 때가 있었다. 어느 날 법무대신의 판결을 본 반둘라 총사령관은 잘못을 저지른 증거가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쓴 사람이 재판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직접 조사를 한 끝에 재판에 진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반둘라 총사령관의 명확하고 공정한 일 처리를 칭찬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파세나디 왕은 기존의 법무대신을 해임시키고 반둘라 총사령관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반둘라 총사령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그를 따르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그가 부하들과 함께 이동할 때면 하나의 부대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고 어쩌다 아들들과 함께 왕궁을 방문하면 왕궁이 비좁아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반둘라 총사령관을 견제하는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그로 인해 지위를 빼앗긴 전前 법무대신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파세나디 왕과 반둘라 총사령관 사이를 이간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무렵 파세나디 왕의 나이는 어느 덧 일흔을 훌쩍 넘겼고 그가 가장 사랑하는 말리카 왕비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곁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힘든 일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파세나디 왕은 점점 마음이 약해졌고 아첨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졌으며 의심도 많아졌다. 그러던 중 반둘라 총사령관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는 간신들의 말이 그의 귀에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는 모함이었으나 한번 시작된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국 파세나디 왕은 그들을 한꺼번에 숙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함정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반둘라 총사령관은 파세나디 왕의 명에 따라 아들들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국경 지역을 순찰하러 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적군이 아니라 간신배들이 보낸 군사들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한결같은 충성심으로 코살라 왕국을 굳건하게 지탱해왔던 반둘라 총사령관은 모함으로 인해 32명의 아들들과 한 날, 한 시 같은 장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숙청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파세나디 왕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이간질에 휘둘린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내린 결정을 되돌릴 수도,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도 없었다. 그날 이후 파세나디 왕은 정치를 비롯한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고, 왕궁 안 밖으로는 반란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비두다바의 반란과 파세나디 왕의 죽음

 반둘라 총사령관의 죽음은 파세나디 왕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충신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주변에는 아첨하는 신하들만 남았다. 왕위라는 지위만 남은 것 같은 공허함이 수시로 파세나디 왕을 짓눌렀다. 그는 마음이 허전할 때마다 부처님을 찾았다. 어느 날 신하들과 함께 기원정사를 찾은 파세나디 왕은 칼, 왕관, 황금 신발, 하얀 사슴의 꼬리털이 달린 부채와 하얀 양산을 모두 내려놓고 맨발로 부처님을 향해 걸어갔다. 이 다섯 가지 물건은 왕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그때 파세나디 왕의 경호를 맡고 있던 장군은 바로 반둘라 총사령관의 조카였다. 반둘라 총사령관의 죽음에 대하여 항상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던 그는 파세나디 왕이 기원정사에 들어가자마자 이 다섯 가지 물건을 들고 비두다바에게 갔다. 파세나디 왕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있던 그에게는 한 조각의 충성심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비두다바라면 반둘라 총사령관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국왕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징표를 본 비두다바의 마음속에서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그는 석가족에 대한 복수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지만 매번 파세나디 왕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세나디 왕이 없다면 석가족을 멸망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비두다바가 반역을 결심하자 반둘라 총사령관의 죽음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던 많은 신하들과 평소 파세나디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신하들이 그의 편에 섰다. 조정을 장악하고 군사력을 확보한 비두다바는 순식간에 이복형 기타 태자를 제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한편 반역이 일어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파세나디 왕은 자신의 호위하던 이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자 당황하였다. 차마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던 시녀 한 명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왕을 상징하는 다섯 가지 증표는 물론이요 민심과 권력, 군사력까지 잃은 파세나디 왕은 그녀를 의지하여 마가다 왕국으로 향했다. 몇 해 전, 빔비사라 왕의 부음을 들었을 때 파세나디 왕은 아자타삿투 왕을 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제 파세나디 왕은 아자타삿투 왕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처지였다. 늙은 몸을 이끌고 낡은 수레에 의지하여 간신히 마가다 왕국의 국경에 도착한 파세나디 왕은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한 채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참담한 죽음이었다.



복수의 칼날을 꺼낸 비두다바

 파세나디 왕의 부음을 전해들은 비두다바는 슬퍼하기는커녕 아무 거리낌 없이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랜 동안 갈아왔던 복수의 칼날을 드디어 꺼낸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비두다바의 소원은 단 하나, 석가족의 멸망을 두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전투코끼리를 탄 비두다바는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카필라 왕국을 향해 진격하였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 밖에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코살라 왕국과 카필라 왕국의 국경 근처에 홀로 앉아 비두다바와 그의 군사들을 맞았다.

 뜨거운 햇빛 아래 앉아계신 부처님을 본 비두다바는 걸음을 멈추고 전투 코끼리에서 내렸다. 그리고 부처님께 다가가 예배를 올린 뒤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늘이 시원한 나무가 아니라 죽은 나무 아래 앉아 계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비두다바와 그의 뒤를 지키고 있는 전투 코끼리부대와 기마부대, 최정예 궁수를 갖춘 군사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왕이여, 친족의 그늘이 시원합니다.”

 친족이라는 단어를 들은 비두다바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에게 석가족은 친족이 아닌 원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부처님께서 그에게 직접 친족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이 아닌가. 부처님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비두다바는 군사를 돌려 왕궁으로 돌아갔다. 부처님의 말씀은 온화했으나 그 한 마디로 석가족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모두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몸소 길 위에 앉아 그를 저지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세 차례에 걸쳐 비두다바를 저지하셨다. 하지만 부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석가족의 정해진 숙명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하나마 왕의 죽음과 석가족의 멸망

 군사를 일으킨 지 이레째 되는 날, 비두다바는 네 번째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다. 이번에는 부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각오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심한 비두바다는 그대로 카필라 왕국을 향해 진격하였고 무자비한 공격을 퍼부었다. 비두바다의 군대를 맞은 석가족은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쏘아 싸울 의지가 없음을 밝혔으나 비두다바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결국 석가족은 카필라 성 안으로 후퇴한 뒤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수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여유 있게 카필라 성을 포위한 비두다바는 항복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며 석가족을 회유했다. 그의 회유를 믿고 싶었던 석가족은 긴 회의 끝에 성문을 열었으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죽음뿐이었다. 살아남은 석가족을 포로로 삼은 비두다바는 이들을 생매장시킬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비두다바는 석가족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살려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처참한 몰골로 묶여있던 마하나마 왕이 비두다바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말했다.

 “부디 저에게 나의 종족을 구할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마하나마 왕은 연꽃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연못을 가리키며 자신이 연못에 들어가 숨을 참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남은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오만하던 마하나마 왕이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비두다바는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비두다바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하나마 왕은 연못에 뛰어들었고 동시에 죽음을 기다리던 석가족 포로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두다바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우왕좌왕 도망가는 석가족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비두다바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마하나마 왕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하나마 왕이 무슨 술수를 부렸을 것이라 생각한 비두다바는 병사를 시켜 마하나마 왕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라고 명했다. 연못으로 들어간 병사는 잠시 후 밖으로 나온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하나마 왕께서는 연못 안에 있는 단단한 나무를 부둥켜안고 뿌리에 머리카락을 감은 채 숨이 끊어지셨습니다. 아마 영원히 물 밖으로 나오시지 않을 것입니다.”

 마하나마 왕의 죽음과 함께 카필라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부처님의 종족이자 혈통에 대한 오만이 강했던 석가족은 오만으로 인해 멸망한 것이다. 복수를 완성한 비두다바를 기다리고 있던 것 또한 멸망이었다. 원한으로 얻은 비두다바의 왕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코살라 왕국은 얼마 후 마가다 왕국에 병합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원한을 원한으로 되갚은 비두바다의 복수는 카필라 왕국 뿐 아니라 코살라 왕국까지 멸망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 관련 자료


글 : 조민기(칼럼니스트) gorah@naver.com
삽화 : 견동한


· 작가 소개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를 졸업하였다. 영화사를 거쳐 광고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하였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외조 - 성공한 여자를 만든 남자의 비결>가 있으며 현재 세계일보에 <꽃미남 중독>과 <외조의 기술>을 연재중이다.

 한 사람의 불자(佛子)이자 여자로써 또 꽃미남 애호가이자 전문가로써 2500여년 불교 역사에 존재해 왔던 멋진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발원 끝에 좋은 인연을 만나 조계사 홈페이지에 <경전 속 꽃미남>을 연재하게 되었다.

 <경전 속 꽃미남>은 21세기 재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를 초월하는 멋진 남성에 대한 이야기로 불자(佛子) 뿐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에게 긍정적이고도 즐거운 귀감을 줄 것이다.


· 미디어 조계사

· Life of Buddha: King Pasenadi of Kosala (Part 2, 1) - BuddhaNet

· The Buddha and King Pasenadi of India

· [PDF] king pasenadi - Beyond the 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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