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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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9. 시현경(示現經)


비구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비구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비구들이여, 시각(眼)거 불타고 있고 형상(色)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 의식(眼識)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眼觸)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眼觸生受)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우울•슬픔•고통•불쾌•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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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9.

시현경(示現經)


<원문(原文)>

(一九七)
如是我聞
一時。佛住迦闍尸利沙支提。與千比丘俱。皆是舊縈髮婆羅門
爾時。世尊為千比丘作三種示現教化。云何為三。神足變化示現.他心示現.教誡示現
神足示現者。世尊隨其所應。而示現入禪定正受。陵虛至東方。作四威儀。行.住.坐.臥。入火三昧。出種種火光。青.黃.赤.白.紅.頗梨色。水火俱現.或身下出火。身上出水。身上出火。身下出水。周圓四方亦復如是。爾時。世尊作種種神變已。於眾中坐。是名神足示現
他心示現者。如彼心.如彼意.如彼識。彼應作如是念.不應作如是念.彼應作如是捨.彼應作如是身證住。是名他心示現
教誡示現者。如世尊說。諸比丘。一切燒然。云何一切燒然。謂眼燒然。若色.眼識.眼觸.眼觸因緣生受。若苦.若樂.不苦不樂。彼亦燒然。如是耳.鼻.舌.身.意燒然。若法.意識.意觸.意觸因緣生受。若苦.若樂.不苦不樂。彼亦燒然。以何燒然。貪火燒然.恚火燒然.癡火燒然。生.老.病.死.憂.悲.惱苦火燒然
爾時。千比丘聞佛所說。不起諸漏。心得解脫。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역문(譯文)>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가사시리사(伽闍尸利沙)의 지제(支提)2)에서 1천 비구들과 함께 계셨는데 그들은 다 옛날에 머리를 꼬는 바라문이었다. 그 때 세존께서는 1천 비구들을 위해 세 가지를 나타내 보여 교화하셨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이고, 남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신통을 나타내 보이며, 가르침을 나타내 보이셨다.

신통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세존께서는 그 응하는 바를 따라 선정의 정수(正受;三昧)에 드는 모습을 보이셨으니, 허공을 날아 동방으로 가서 다니고 머무르며 앉고 눕는 네 가지 위의를 짓고, 화삼매(火三昧)에 들어 파랑· 노랑· 빨강· 하양· 주홍과 파리(頗梨)빛의 여러 가지 불빛을 내며, 물과 불을 함께 나타냈는데 혹 몸 아래로 불을 뿜고 몸 위로 물을 뿜기도 하고, 몸 위로 불을 뿜고 몸 밑으로 물을 뿜기도 하였으며, 두루 사방에서도 또한 이와 같이 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신변을 나타내신 뒤에 다시 대중 가운데 앉으셨으니, 이것이 신족(神足)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남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신통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의 마음[心]과 같이, 남의 뜻[意]과 같이, 남의 분별[識]과 같이, '저 사람은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분명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은 분명 이렇게 버릴 것이다. 저 사람은 분명 이렇게 몸으로 증득하여 머무를 것이다'라고 아셨으니, 이것이 남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신통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이다.

 가르침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세존께서 하신 말씀이다.

 "비구들아,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눈이 불타고 있고, 빛깔과 안식과 안촉과 안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귀· 코· 혀· 몸도 마찬가지이며, 이와 같이 뜻도 불타고 있고, 법과 의식과 의촉과 의촉을 인연하여 생기는 느낌, 즉 괴로운 느낌․즐거운 느낌․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고,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으며,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근심· 슬픔· 번민· 괴로움의 불로 불타고 있느니라."

 그 때 1천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解釋)>

 이 경은 《잡아함경》 제 8권 제 197경(《대정장》2, p.50b-c)이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 35:28 Āditta-sutta(SN Ⅳ, pp.19-20)이다. 이 경의 핵심은 붓다가 세 가지 종류로 교화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이고, 남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신통을 보인 뒤, 일체(一切, sabbam)가 불타고 있다는 가르침을 보였다는 것이다. 《율장(律藏)》 「대품(大品)」(Vin Ⅰ, pp.34-35)에는 붓다의 세 번째 설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승경전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제 3 「비유품(譬喩品)」에 나오는 '삼계의 불타는 집(三界火宅)'이라는 비유는 이 경을 모티브로 삼아 후대에 찬술된 것이다.

한역의 가사시리사(迦闍尸利沙)는 가야시사(Gayāsīsa, 伽倻尸沙)의 음사이다. 가야시사는 보드가야(Bodhgayā) 근처에 있는 산이다. 이곳은 데와닷따가 승단을 분열시켜 그를 추종하는 비구들을 데리고 승단을 떠나서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 권8에 “니련선하를 건너서 가야성(伽耶城))에 이르게 된다. 성은 몹시 험하고도 견고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적다. 바라문들만이 천여 가구 살고 있는데, 이들은 대선인(大仙人)의 자손들로서, 왕은 그들을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도 왕에게 상당한 존경을 표할 뿐이다." (<大唐西域記> 권8(<大正藏> 51, p.915a), “渡尼連禪河, 至伽耶城. 甚險固, 少居人, 唯婆羅門有千餘家, 大仙人祚胤也,王所不臣, 眾咸宗敬.”)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가야성을 브라흐마가야(Brahma-gayā)라고 부르며 붓다가야(Buddha- gayā)와 구분하고 있다. <중허마함경> 제 6((<大正藏> 3, p.948c)에 의하면, 이 지명의 유래는 대선인(大仙人) 가야(伽耶)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往誐耶仙人聚落, 名烏嚕尾螺西曩野禰, 側近經行觀眺習(=寂)靜之處. 尼連河次見一林野, 地上平正樹木幽閑。如月清涼呼為聖地。")
왕아야선인취락, 명오로미라서낭야니, 측근경행관조습(=적)정지처. 니연하차견일림야, 지상평정수목유한。여월청량호위성지.

지제(支提)'는 빨리어 '쩨띠야(cetiya)' 혹은 산스끄리뜨 'caitya'를 음사한 것이다. 이 단어는 적취(積聚)의 뜻으로, 흙과 돌을 쌓아 무더기를 이룬 것을 말한다. 지제(支帝)•지제(脂帝)•지징(支徵)•제다(制多)•제저(制底)•제저야(制底耶) 로도 음역하고 영묘(靈廟) 혹은 가공양처(可供養處)로 의역하기도 한다.

 '머리를 묶은 바라문'이란 붓다 당시의 결발행자(結髮行者)를 말한다. 이들은 머리를 땋고 불을 숭배하면서 해탕을 목표로 고행했다고 한다. 이들은 신 '아그니(agni, 火神)'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사화외도(事火外道) 혹은 배화교도(拜火敎徒)라고 불렸다. 또한 이들은 머리를 땋고 주로 고행하였기 때문에 결발행자(結髮行者) 혹은 결발외도(結髮外道)라고 불렸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와 수행 내용 등과 같은 자세한 사항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정수(正受)'는 선정 혹은 삼매의 다른 이름이다. '허공을 날아'는 '능허(陵虛)'를 옮긴 말이다. 능허는 '공중을 나른다'는 뜻이다. '네 가지의 위의(四威儀,사위의= 사의(四儀))는 출가 수행자가 엄숙하고 장중함을 유지하기 위해 행(行), 주(住), 좌(坐), 와(臥)에 일정한 규범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른바 걸음은 바람과 같고(行如風) 설 때는 소나무 같고(立如松), 앉을 때는 종과 같고(坐如鐘), 누울 때는 활과 같은(臥如弓) 행동의 위의를 말한다.

화삼매(火三昧)'는 화광삼매(火光三昧)인데, 제 4선정을 가리킨다.

몸으로 증득하여(身證)는 멸진정(滅盡定)에 의거하여 열반법을 얻음으로써 몸이 적정락(寂靜樂)을 얻어 불환과(不還果)릐 성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불타고 있다는 소연(燒燃)은 '번뇌'의 다름 이름이다.

<빨리율> (VinⅠ, pp. 34-35)에 의하면, 이 경은 붓다가 세 번째 설법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뒤 바라나시(Bārāṇasī, 波羅奈城)의 미가다야(Migadāya, 鹿野苑)에서 다섯 비구들을 교화하고 다시 가야(Gayā, 伽倻)의 우루웰라(Uruvel ā,優樓頻螺, 우루빈나)로 돌아와 결발행자였던 우루웰라 깟사빠(Uruvela Kassapa, 優樓頻螺迦葉, 우루빈나가엽),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나제가엽),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 伽倻迦葉, 가야가엽)등 깟사빠(Kassapa, 迦葉, 가엽) 삼형제를 교화하여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천 명의 제자들을 개종시켰다.

삼형제 중 첫 번째 우루웰라 깟사빠(Uruvela Kassapa, 優樓頻螺迦葉, 우루빈나가엽)는 우루웰라 숲 속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렸는데, 그에게는 500 명의 제자가 있었다.

두 번째 나디 깟사빠(Nadī Kassapa, 那提迦葉,나제가엽)는 우루웰라 숲과 가야를 연결하는 네란자라(Neranjarā, 尼連禪河, 니련선하) 강 기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디 깟사빠라고 불렸다. 빨리어로 나디(Nadī)는 강(江) 또는 하(河)라는 뜻이다. 그에게는 300 명의 제자가 있었다.

세 번째 가야 깟사빠(Gayā Kassapa, 伽倻迦葉, 가야가엽)는 하류인 가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그에게는 200 명의 제자가 있었다.

《율장》 「대품」(Vin Ⅰ, p24)에 의하면 특히 "우루웰라 깟사빠는 200 명의 결발(結髮, jaṭila)수행자들의 지도자(指導者, nāyaka)이고, 교도자(敎導者, vināyaka)이며, 최상자(最上者,agga)이고, 수장자(首長者,pamukha)이고, 상수자(上首者, pāmokha,最上)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종교 지도자를 붓다는 초능력으로 굴복시켰다. 이렇게 깟사빠 삼형제를 개종시키 것은 큰 사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붓다의 명성은 크게 드높아졌다.

그 후 붓다는 천 명의 제자들과 같이 가야시사에 올라가 신통을 보이고 불에 비유한 가르침을 펼쳤다. 한역에서는 '시현(示現)', 즉 '신통을 나타내 보였다'를 경명(經名)으로 삼았지만, 니까야에서는 '아딧따(āditta)', 즉 '연소(燃燒)'를 경명으로 정했다. 니까야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비구들이여, 시각(眼)거 불타고 있고 형상(色)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 의식(眼識)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眼觸)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眼觸生受)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늙음•죽음•우울•슬픔•고통•불쾌•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청각도 … 후각도 … 미각도 … 촉각도 … 뜻도 불타고 있고, 법도 불타고 있고 … 태어남•늙음•죽음•우울•슬픔•고통•불쾌•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시각도 싫어하여 ,형상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싫어하여 떠난다.

 청각도 … 후각도 … 미각도 … 촉각도 … 뜻도 싫어하여 떠나고, 법도 싫어하여 떠나고, 뜻의식도 싫어하여 떠나고, 뜻접촉도 싫어하여 떠나고, 뜻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이와 같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붓다는 가섭 삼형제와 그들의 추종자였던 천 명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일체가 불타고 있다고 설했다. 그들은 붓다의 제자가 되기 전에 불을 섬기던 자들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일체가 불타고 있다는 붓다의 말씀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천명의 사문들을 데리고 가야시사에 가셔서 그들에 둘러싸여 앉으셔서 '이들에게 어떤 설법이 적절할까? 라고 생각하신 뒤, '이들은 아침 저녁으로 불(aggi)를 섬기던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들에게 십이처(十二處)가 불타고 있음을 설해야겠다. 그러면 그들은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결정하셨다." (SA Ⅱ, p363)고 한다.

 한편 이 경에서 붓다는 천 명의 제자들에게 먼저 신족통(神足通)과 타심통(他心通)을 보여주었다. 천 명의 제자 중에는 스승이 개종했기 때문에 따라서 개종했지만 왜 붓다가 위대한 지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일일이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선 '초월적 지혜'를 보여줌으로써 자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불교를 신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붓다의 이러한 초능력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붓다가 갖춘 초월적 지혜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초경험적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종교의 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무릇 종교는 초경험적 기적에 토대를 두고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 《韓國佛敎》 제 619호, 2014년 2월 21일, 8면 -




·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신행공덕』(불광출판부, 2004),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민족사, 2007), 『사캬무니 붓다』(대숲바람, 2010),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되다』(민족사, 2012)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팔리문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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