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게 되면 교만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온이 ‘나[我]’라고생각하고 오온에 집착한다. 이처럼 오온에 집착하는 것을 오취온(五取蘊, pancupadanakkhandha)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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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5
라후라소문경(羅睺羅所問經)
<원문(原文)>
(二三)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尊者羅후羅往詣佛所, 頭面禮足, 각住一面, 白佛言: “世尊! 云何知•云何見我此識身及外境界一切相, 能令無有我•我所見•我慢•使•繫著?” 佛告羅후羅: “善哉! 善哉! 能問如來: ‘云何知•云何見我此識身及外境界一切相, 令無有我•我所見•我慢•使•繫著?’耶?” 羅?羅白佛言: “如是, 世尊!” 佛告羅후羅: “善哉! 諦聽! 諦聽! 善思念之, 當위汝說. 羅후羅! 當觀若所有諸色, 若過去•若未來•若現在, 若內•若外, 若추•若細, 若好•若醜, 若遠•若近, 彼一切悉皆非我•不異我•不相在, 如是平等慧正觀. 如是受•想•行•識, 若過去•若未來•若現在, 若內•若外, 若추•若細, 若好•若醜, 若遠•若近, 彼一切非我•不異我•不相在, 如是平等慧如實觀. 如是, 羅후羅! 比丘如是知•如是見. 如是知•如是見者, 於此識身及外境界一切相, 無有我•我所見•我慢•使•繫著. 羅후羅! 比丘若如是於此識身及外境界一切相, 無有我•我所見•我慢•使•繫著者, 比丘是名斷愛欲, 轉去諸結, 正無間等, 究竟苦邊.” 時, 羅후羅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譯文)>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에 계셨다. 그때 존자 라후라는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 숙여 예배하고 물러나 한쪽에 서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저의 의식이 있는 이 몸과 바깥 경계의 모든 대상에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소견, 잘난 체하는 거만[我慢]과 같은 번뇌의 얽매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라후라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네가 여래에게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저의 의식이 있는 이 몸과 바깥 경계의 모든 대상에서 나와 내 것이라는 소견, 잘난 체하는 거만과 같은 번뇌의 얽매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훌륭하구나,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잘 사유하고 기억하라. 내 너를 위해 설명하리라. 라후라여, ‘존재하는 모든 색(色)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일체는 모두 나[我]가 아니고, 나와 다르지도 않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평등한 지혜로 바르게 관찰하라. 무상하다고 바르게 관찰하고 나면 색에 대한 애착이 곧 없어지고, 색에 대한 애착이 없어지고 나면 마음이 잘 해탈하느니라. 수(受)•상(想)•행(行)도 마찬가지며, ‘식(識)도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일체는 모두 나가 아니고, 나와 다르지도 않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평등한 지혜로 사실 그대로 관찰하라. 라후라여, 비구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 의식이 있는 이 몸과 바깥 경계의 모든 대상에서 나와 내 것이라는 소견, 잘난 체하는 거만과 같은 번뇌의 얽매임이 없어지느니라.
라후라여, 이와 같이 비구가 만일 의식이 있는 이 몸과 바깥 경계의 모든 대상에서 나와 내 것이란 소견, 잘난 체하는 거만과 같은 번뇌의 얽매임이 없다면, 그 비구는 ‘애욕을 끊고, 모든 결박[結]을 제거하고, 바르게 빈틈없는 한결같음[無間等]으로 고통의 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느니라.”
그때 라후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解釋)>
이 <라후라소문경>은 세존께서 왕사성의 가란타죽원에 계실 때, 라후라(羅候羅) 존자에게 설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과 대응하는 <상윳따 니까야(相應部)>에서는 사왓티(Saavatthi, 舍衛城)의 제따와나(Jetavana, 祇樹給孤獨園)에서 라훌라(Rahula) 존자에게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아가마(Agama)와 니까야(Nikaya)의 전승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은 마가다국(Magadha國)의 라자가하(Rajagaha, 王舍城) 북쪽에 위치한 벨루와나(Veluvana, 竹林精舍)에 있는 숲속을 말한다. 벨루와나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왕사성을 방문했을 때, 빔비사라(Bimbisara) 왕이 붓다에게 기증한 동산이다. 가란타죽원의 어원은 깔란다까니와빠(Kalandakanivapa)인데, ‘다람쥐 먹이 주는 숲’으로 불린다.
한때 어떤 왕이 왕자를 위해 이곳으로 놀러왔다가 만취하여 잠들어 버렸다. 왕의 수행원들이 잠든 왕을 지키고 있다가 꽃과 과일들을 구경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때 근처의 나무줄기에 있던 뱀이 술 냄새를 맡고 왕에게 접근해 왔다. 다람쥐가 그것을 보고 짹짹 거려 왕을 깨웠다. 왕은 다람쥐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곳에 정기적으로 다람쥐 먹이를 주도록 명령했다. 그때부터 이곳을 ‘다람쥐 먹이 주는 숲’으로 부르게 되었다.
여러 문헌에 의하면, 깔란다까(Kalandaka, 迦蘭陀)가 이 동산을 붓다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이곳은 붓다와 제자들이 특히 좋아했던 휴식처였다.
라후라(羅후羅, Rahula)는 붓다의 외아들이다. 아버지가 출가하던 날 태어났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뒤, 처음으로 아버지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의 간청으로 까삘라왓투(Kapilavatthu)를 방문했다.
그때 라훌라의 어머니는 라훌라를 붓다께 보내 유산을 상속해 달라고 시켰다. 붓다는 침묵한 채 공양을 마치고 궁을 떠났다. 라훌라가 뒤따르자 붓다는 사리뿟따(Sariputta) 존자에게 지시하여 라훌라를 출가시켰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숫도다나 왕은 어린아이들의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붓다는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라훌라는 이미 출가했고, 붓다는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했다.
라훌라가 일곱 살이었을 때, 붓다는 라훌라에게
라훌라가 열여덟 살이었을 때,
이 경은 라훌라의 질문에 세존께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훌라의 질문 내용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아야 의식이 있는 이 몸과 바깥 경계의 모든 대상에서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소견, 잘난 체하는 거만[我慢]과 같은 번뇌의 얽매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그 일체는 모두 ‘나[我]가 아니고, 나와 다르지 않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다시 말해서 ‘나[我]라는 생각과 내 것[我所]이라는 생각과 아만(我慢)과 같은 얽매임이 없다면, 애욕을 끊고 모든 결박을 제거하고,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경의 핵심 내용이다.
한편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SN 22, 91-92 Rahula(SN Ⅲ, pp.135-137)이다. 91 Rahula①은 SN 22, 124 Kappa①과 같은 내용이고, 92 Rahula②는 SN 22, 125 Kappa②과 같은 내용이다. 여기서는 SN 22, 91 Rahula-sutta에 대해 살펴보자. 이 경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면 의식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자만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되겠습니까?”
“라훌라여, 그것이 어떠한 색(色)이든 … 그것이 어떠한 수(受)이든 … 그것이 어떠한 상(想)이든 … 그것이 어떠한 행(行)이든 … 그것이 어떠한 식(識)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라훌라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아야 의식을 가진 이 몸과 밖의 모든 대상들에 대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같은 교만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SN Ⅲ, pp.135-136)
위의 경에 나오는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m mama neso ham asmi na meso attati)라는 대목에 유의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오온(五蘊)을 가리킨다. ‘이것’ 대신에 ‘오온’을 대입해 보면, ‘오온은 내 것이 아니요, 오온은 내가 아니며, 오온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게 되면, ‘나’라는 생각과 ‘내 것’이라는 생각과 같은 교만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위 대목에 대응하는 한역에서는 ‘그 일체는 모두 나[我]가 아니고, 나와 다르지도 않으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彼一切非我•不異我•不相在)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말하는 ‘일체’는 오온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온은 내가 아니고[非我], 오온과 나는 다르지도 않으며[不異我], 오온과 오온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不相在]’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니까야>와 <아가마> 모두 오온무아(五蘊無我)를 설하고 있다. 이른바 ‘오온은 내가 아니며, 내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온이 ‘나[我]’라고 생각하고 오온에 집착한다. 이처럼 오온에 집착하는 것을 오취온(五取蘊, pancupadanakkhandha)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붓다는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오온(五蘊)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러나 불멸후에는 무아론(無我論)에서 점차 유아론(有我論)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른바 설일체유부의 명근(命根), 대중부의 근본식(根本識), 화지부의 궁생사온(窮生死蘊), 독자부와 정량부의 보특가라(補特伽羅), 상좌부의 유분식(有分識, bhavanga), 경량부의 일미온(一味蘊), 그리고 대중부나 분별론자들이 주장한 세심(細心), 경량부의 종자(種子) 등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이 아비달마불교에서 주장되고 있었다. 아뢰야식(阿賴耶識, alayavijnana) 사상은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 성립된 것이다.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무아(無我)를 비아(非我)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현존하는 한역 <잡아함경>에 무상(無常)•고(苦)•공(空)•비아(非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한역 <잡아함경>과 대응하는 <상윳따 니까야>에는 비아(非我)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아니 ‘비아(非我)’라는 빨리어 단어 자체가 없다. 이로 미루어 상좌부(上座部) 계통의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ada)에서는 유아론(有我論)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신행공덕』(불광출판부, 2004),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민족사, 2007), 『사캬무니 붓다』(대숲바람, 2010),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되다』(민족사, 2012)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팔리문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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