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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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4. 염리경(厭離經)


무아는 오온에 대한 집착 벗어나 자기중심적인 아집 버리는 것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은 ‘오온에는 아(我)가 없다(無我)’가 아니라 ‘오온은 아(我)가 아니다(非我)’라는 것이 본래의 취지이다.

다시 말해서 오온이라는 요소는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자유로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취지에서 보면 오히려 ‘비아(非我)’라고 표현한 쪽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다만 여기서 오온이 비아임을 논증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로서 무아임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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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4

염리경(厭離經)

<원문(原文)>

(九) 如是我聞: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非我者亦非我所. 如是觀者, 名眞實正觀. 如是受•想•行•識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非我者亦非我所. 如是觀者, 名眞實正觀. 聖弟子! 如是觀者, 厭於色, 厭受•想•行•識, 厭故不樂, 不樂故得解脫. 解脫者眞實智生: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時,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譯文)>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我]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我所]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상•행•식 또한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거룩한 제자들이여, 이렇게 관찰하면 그는 곧 색을 싫어하고, 수•상•행•식을 싫어하게 되며, 싫어하기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하게 된다.

해탈하면 진실한 지혜가 생기나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해석(解釋)>

 이 경의 핵심은 오온(五蘊)을 바르게 관찰하면 오온을 싫어하여 떠나게[厭離]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온은 무상한 것이요,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며, 괴로움은 곧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바른 관찰이며, 이렇게 바르게 관찰하면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은 오온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설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경전이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빨리어 ‘안앗따(anatta 혹은 anattan)’, 즉 무아(無我)를 비아(非我)로 번역했다. 이른바 “색(色)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요, 괴로움은 곧 나[我]가 아니며, 나가 아니면 또한 내 것[我所]도 아니다(色無常, 無常卽苦, 苦卽非我, 非我者亦非我所).”라는 부분이다. 이 경에서 ‘안앗따(anatta)’를 비아(非我)로 번역함으로써 붓다의 무아론(無我論)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사실 ‘무아(자아가 없다)’와 ‘비아(자아가 아니다)’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무아는 아(我)라는 존재를 완전히 무화(無化)한 관념인 데 반해, 비아는 아(我)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관념의 표현으로 이해되고 있다.

 지난번 <무상경(無常經)>을 설명하면서, <무상경>에 대응하는 <니까야>에는 ‘공(空)•비아(非我)’라는 단어가 없는데, 설일체유부의 관점이나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역 <무상경>에 ‘공•비아’라는 단어를 삽입한 것은 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무아설을 어떤 이유로 다르게 해석할 필요성을 느끼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에 살고 있다는 어떤 불자가 이러한 필자의 주장에 의문을 갖고 나에게 메일로 질문을 해왔다. 질문의 요지는 “<니까야>에 ‘내가 아니며’라는 대목이 많이 나오는데, <니까야>에는 공(空)•비아(非我)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 증거로 제시한 경문은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에 나오는 내용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과 대응하는 <니까야>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즉 SN 22:15; SN 35:182; SN 35:186 등이다. 세 가지 중에서 SN 22:15 Yadanicca-sutta(무상한 것 경)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움인 것은 무아(無我)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수(受)•상(想)•행(行)•식(識)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움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이렇게 보고, 색(色)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수(受)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상(想)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행(行)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식(識)에 대해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고[厭惡], 욕심을 여의고[離欲],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그는 분명히 안다.“ (SN Ⅲ, p.22)


 위의 경에 나오는 첫 번째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앞에서 질문한 불자와 같은 질문을 되풀이 하게 된다. 우선 이 대목을 빨리어 원문과 같이 읽어보자.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상하고,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며, 괴로움인 것은 무아(無我)이다.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SN Ⅲ, p.22, “Rupam bhikkhave aniccam, yad aniccam tam dukkham, yam dukkham tad anatta, yad anatta tam netam mama neso ham asmi na meso atta ti. Evam etam yathabhutam sammappannaya datthabbam.”)

 위 경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무아인 것(yad anatta tam)’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 즉 무아인 것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m mama, neso ham asmi, na meso atta)는 것이다. 이 구절은 오온의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임을 재차 확인하는 대목이다. 이 구절을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이른바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netam mama)는 괴로움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형성된 것들에 대한 견해에서 내 것이라는 생각(mamam-kara)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아니고’(neso ham asmi)라는 것은 무상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에서 생각(aham-kara)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a meso atta)라는 것은 이런 견해에서 자아를 거머쥠(atta-gaha)이 없기 때문이다.(각묵 옮김, <상윳따 니까야> 제3권(2009), p.149, no.92)

 좀 더 쉽게 풀이하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은 ‘오온에는 아(我)가 없다(無我)’가 아니라 ‘오온은 아(我)가 아니다(非我)’라는 것이 본래의 취지이다. 다시 말해서 오온이라는 요소는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자유로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취지에서 보면 오히려 ‘비아(非我)’라고 표현한 쪽이 더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다만 여기서 오온이 비아임을 논증하기 위한 논리적 전제로서, 무아임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무아를 언급할 때의 전형적인 문장이며, 이러한 관찰을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 해탈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전형적인 언급이 의도하는 바는 자기중심적인 아집을 버리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아집의 주체로서의 아(我)를 부정하는 취지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다른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색(色)이 있기 때문에, 색을 집취(執取)하기 때문에, 색에 집착하기 때문에, …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etam mama, eso ham asmi, eso me atta)고 본다.”(SN Ⅲ, p.181)

 이것을 유신견(有身見), 즉 오온에 불과한 육신에 아(我)가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와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① 오온은 ‘나’이다. ② 나는 오온을 지닌다. ③ ‘나’ 속에 오온이 있다. ④ 오온 속에 ‘나’가 있다. 이러한 이해는 범부의 인식이다.

반면 성자는 “① 오온은 ‘나’가 아니다. ② 나는 오온을 지니지 않는다. ③ ‘나’ 속에 오온이 없다. ④ 오온 속에 ‘나’가 없다.”라고 본다.


위에서 언급한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은 결국 ‘나’가 없다(無我)는 데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나’는 초월적이고 상주하는 불변의 어떤 것이며, 또는 고정적인 실체를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트만(atman)이라고 불렀던 상주불변하는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온을 ‘나의 자아’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잡아함경> 권5, 제109경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색(色)을 지닌 온갖 것은 과거•현재•미래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성긴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추한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한결같이 쌓이고 모인 것이라고 이렇게 관찰한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모든 것은 고(苦)다. 모든 것은 공(空)이다. 모든 것은 비아(非我)이다.(<잡아함경> 권5, 제109경(<대정장> 2, p.35a),

“所有諸色, 若過去•若未來•若現在, 若內•若外,•若추•若細, 若好•若醜, 若遠•若近, 一向積聚, 作如是觀: 一切無常•一切苦•一切空•一切非我.”)


또한 <잡아함경> 권8, 제188경에 “무상의 가르침대로 고(苦)•공(空)•비아(非我) 역시 그와 같다고 설한다.”(<대정장> 2, p.49b, “如無常, 如是苦•空•非我, 亦如是說.”)라는 대목과 <잡아함경> 권8, 제196경에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설했듯이, 그와 같이 모든 것은 고(苦)이고 공(空)이며 비아(非我)이다.”(<대정장> 2, p.50b, “如說一切無常, 如是一切苦•一切空•一切非我.”)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와 같이 무상•고•공•비아가 하나의 교설로서 언급되는 예는 <잡아함경>의 열세 곳에서 발견되지만, 빨리 <니까야>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아(非我)가 형이상학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無我)의 의미로 이해되었음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움인 동시에 무아임의 근거가 된다.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바른 지혜로써 보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오온이 무상•고•무아라는 것은 지혜로써 여실하게 관찰되어야 할 것이지, 범부적 입장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상•고•무아이기 때문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을 비롯한 <무아상경(無我相經)>에 나오는 ‘아(我)가 아니다’라는 자구(字句)에만 얽매어 이해하면, 붓다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양면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을 자유로이 지배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을 아(我)라고 상정하여 이것을 암묵적으로 중시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무아설의 공식을 통해 붓다가 결국 오온의 밖에 또는 오온을 초월하여 아(我)가 존재함을 인정한 것으로 믿는다. 그들은 ‘자아가 없다’는 무아를 ‘자아가 아니다’라는 비아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이를테면 영국의 리스 데이비즈(C.A.F. Rhys Davids) 여사와 일본의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등이다. 이에 동조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신행공덕』(불광출판부, 2004),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민족사, 2007), 『사캬무니 붓다』(대숲바람, 2010),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되다』(민족사, 2012)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팔리문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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