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육의 그림 스님에 빠지다
작자미상, ‘아난과 가섭’
선등(禪燈)은 가섭의 마음에 켜고, 교해(敎海)는 아난의 입에 붓다
“아난은 안 됩니다.”
마하가섭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난은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제자입니다. 그런데 왜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혹시 아난이 지난번에 반역을 도모한 제바달다의 동생이라서 내치려는 걸까. 500명의 비구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마하가섭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난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난이 아라한과 증득 못하자
분발심 일으키게 한 마하가섭
용맹정진에 결국 깨달음 얻어
이후 본격적인 경장 정리 시작
아무리 많은 법문 알고 있어도
수행•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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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결집이 이루어진 왕사성 칠엽굴(七葉窟)에서의 일이었다. 결집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직후에 이루어졌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 교단내부에서는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져버리거나 잘못 전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또한 스승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비구들의 행동이 자칫 흐트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교단을 이끈 장로들은 고심 끝에 결집을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결집이란 부처님 제자들이 저마다 들은 것을 외워, 그 바르고 그릇됨을 논의하고, 기억을 새롭게 하여 정법(正法)을 편집한 사업이다. 결집은 시대의 요청에 따라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에서는 마하가섭을 상좌(上座)로 뛰어난 제자 500명의 비구가 엄선되었다. 교리에 해당되는 경장과 계율에 해당되는 율장 등 2장(藏)의 내용을 결정할 예정이었다. 후대 불교사의 방향을 가늠할 중요한 결집인 만큼 경장과 율장을 암송할 사람을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율장을 암송할 비구는 우파리가 선정됐다. 만장일치였다. 문제는 경전을 암송할 비구를 선정할 때 발생했다. 500명의 비구들은 당연하다는 듯 아난을 지목했다. 그런데 마하가섭이 딴지를 걸었다. 아난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마하가섭은 왜 그랬을까. 진짜 아난이 제바달다의 동생이라서 그를 제외시키려 했던 것일까. 그 이유를 밝히기에 앞서 먼저 아난과 마하가섭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아난과 마하가섭은 두 사람 다 부처님의 십대제자에 들어간다. 부처님 곁에는 항상 천이백오십 명의 제자들이 함께 수행정진 했다. 그 중에서도 열 명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분신과도 같았다. 깨달음의 깊이나 수행의 정도가 다른 비구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열 명의 제자는 두타제일 마하가섭, 다문제일 아난, 지혜제일 사리불, 해공제일 수보리, 설법제일 부루나, 신통제일 목련, 논의제일 가전연, 천안제일 아나율, 지계제일 우파리, 밀행제일 라훌라였다. 모두 기라성 같은 제자들이었다. 모두 각자가 도달한 수행의 특성은 다를지언정 깊이에 대해서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제자들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십 대 제자 중에서 굳이 아난과 마하가섭만을 살펴본 데는 이유가 있다. 부처님의 심법(心法)은 마하가섭이, 교법(敎法)은 아난이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아난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아난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던 그날 태어났다. 아난이 사촌형인 부처님을 처음 본 것은 8살 무렵이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처음으로 고향을 찾을 때였다. 아난의 형인 데바닷다는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부처님을 보고 그 즉시 출가했다. 나이가 어린 아난도 빛으로 둘러싸인 성스러운 부처님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청년이 된 아난은 비록 부처님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역시 용모가 수려하고 기품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잘생겼던지 마등가의 기녀가 아난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내용은 ‘그림, 불교의 가르침에 빠지다’ 편에서 살펴보았다. 그는 외모뿐만 아니라 집중력과 총명함도 비상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사리불과 목건련이 아난에게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사양했다. 거듭되는 요청을 받고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게 되자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부처님께 올린 의복과 공양은 받지 않겠다는 것과 부처님께서 신도들의 초대를 받아 가신 자리에는 함께 가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만약 이 조건을 들어준다면 평생 부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했다. 그 조건을 계기로 아난은 정식으로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부처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고 시봉했다. 그리고 비상한 기억력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전부 기억해냈다. 아난을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난이 부처님 법을 잘 듣고 잘 기억한 것은 경전결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난의 공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성이 출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사람도 아난이었다. 부처님의 이모이자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왕비는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남녀가 함께 수행하는 것의 어려움을 들어 거절했다. 세 차례나 간청했지만 역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본 아난은 왕비가 측은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난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처님의 말씀이나 행동을 거역해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부처님께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도 여전히 거절하는 부처님께 아난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왕비님은 부처님을 길러주신 양모입니다. 그런 분께 어찌 그리 매정하게 대하십니까? 왕비님은 왕께서 돌아가신 후 궁전을 버리고 오셨기 때문에 이제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왕비님의 출가를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거듭되는 아난의 간청에 깊은 생각에 잠기신 부처님은 비구니들이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계를 마련하라고 이른 뒤 출가를 허락하셨다. 이로써 최초의 비구니 승단이 형성됐다. 이렇게 탄생된 비구니 승단에서 마하가섭의 아내였던 밧다도 구족계를 받았다.
이렇게 영특하고 배려심 깊은 아난을 마하가섭이 싫어할 리 없다. 마하가섭이 누구인가. 그는 출가 과정부터가 다른 비구와 다르게 특별했다. 마하가섭의 출가과정에 대해서는 ‘그림, 불교에 빠지다‘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마하가섭은 위대한 가섭이라는 뜻이다. 대가섭(大迦葉) 혹은 가섭존자(迦葉尊者)라고도 칭한다. 마하가섭은 두타제일(頭陀第一)로 통한다. 두타는 번뇌의 티끌을 떨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마하가섭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이다. 마하가섭은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강권으로 결혼을 했다. 그러나 부부가 12년 동안 청정행을 지키며 수행자처럼 살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가진 재산을 전부 나눠준 뒤 둘 다 출가했다. 그는 출가할 무렵 바이샬리에 있는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부처님의 분소의(糞掃衣)를 전해 받았다. 그는 출가 한 지 7일 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주로 칠엽굴에서 수행하며 두타행을 실천했다. 칠엽굴은 제1차 결집을 한 장소다. 그는 탁발할 때 가난한 집만 골라서 다녔다. 평생 공덕을 쌓을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시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마하가섭을 부처님은 크게 믿고 의지했다.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크게 마음을 내 보인 것은 세 번이었다. 이것을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첫째는 부처님이 대중에게 설법하고 있을 때였다. 마하가섭이 뒤늦게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들어왔다. 그러자 부처님은 “어서 오라 가섭이여!”라고 말하면서 앉은 자리의 절반을 나누어주며 앉으라고 했다. 이것이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이다. 두 번째는 부처님이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대범천왕이 금색 바라화(波羅花)를 바치자 부처님이 그 꽃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대중들에게는 꽃이 보이지 않아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오직 마하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다. 이 장면을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 혹은 영산회상거념화(靈山會上擧拈花)라고 한다. 세 번째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였다. 먼 곳에 나가 있다 뒤늦게 도착해보니 부처님은 이미 입관되어 있었다. 부처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마하가섭이 슬피 울자 부처님께서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놓으셨다. 그리고 아무리 불을 붙여도 타지 않던 장작더미가 스스로 타오르며 환하게 어둠을 밝혔다. 이것을 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 혹은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라 한다. 삼처전심은 부처님의 마음이 마하가섭에게 오롯이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위대한 마하가섭이었다. 그런 마하가섭이 칠엽굴에서 아난의 참석을 반대했던 것은 그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아난이 진실로 깨닫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를 깨닫게 할 것인가? 대분심(大憤心)을 일으키게 하면 된다. 원나라 때의 고승 고봉원묘(高峯原妙,1238~1295)는 참선하는 데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큰 믿음(大信心)과 큰 분발심(大憤心)과 큰 의심(大疑情)이다. 이 중에서 만약 한 가지라도 빠지만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 끝내는 쓸모없는 그릇이 되고 만다했다. 아난에게는 큰 믿음과 큰 의심은 있었는데 큰 분발심이 없었다. 이를 간파한 마하가섭이 그를 자극해 큰 분발심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아난은 7일간의 용맹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마하가섭은 위대한 선배였다. 아난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과를 증득하자 비로소 경장의 정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로 시작되는 아난의 선창에 다른 비구들의 증명이 더해졌고 부처님의 말씀으로 확정됐다. 팔만대장경의 시작이었다. 경전의 정리는 오로지 아난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니 대선배 마하가섭의 지도덕분이었다. 마하가섭은 부처님 열반 후 20년간 승가를 이끌었던 제일 큰 어른으로 120세가 되어 열반에 이르자 아난에게 법을 전했다.
돈황 제45굴에 조각된 ‘아난과 가섭’은 당나라 때 작품이다. 아난과 가섭을 조각한 작품은 여러 점이 전하지만 두 아라한의 특징을 이만큼 선명하게 드러난 작품은 보기 드물다. 잘 생긴 아난은 젊고 당당한 미남의 모습으로, 허름하고 깡말랐지만 평생 두타행을 실천한 마하가섭은 나이 든 수행자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모래바람과 건조한 날씨 때문에 많이 변색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두 수행자의 특성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가 쓴 ‘선가귀감(禪家龜鑑)’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선의 요지)가 되었고,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敎門)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마하가섭의 선법과 아난의 교법이 불교를 전파한 두 기둥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마하가섭이 전한 선법은 널리 전파되지 못하고 아난존자가 전한 교법만이 유포되었다. 중국에서도 초기에는 교법이 불교의 중심이었다가 달마가 건너 온 이후에야 선법이 크게 일어났다.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올 한 해 동안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난과 마하가섭 두 제자의 모습은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평생 부처님 곁에서 가장 많은 법문을 들은 아난이 500명의 비구들보다 늦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불교에서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아무리 많은 법문을 알아봤자 선을 통해 증득하지 못하면 결국 남의 밭에 자라는 곡식을 세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아난과 마하가섭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아직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다. 아직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敎)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때다. 부처님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부지런히 경전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큰 믿음과 큰 분발심과 큰 의심이라는 솥의 다리가 아직까지는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정육
· 조정육
저자 조정육은 전남대학교 불문과,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동국대학교에서 박사를 수료했다. 고려대, 국민대, 성신여대,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강의했으며, 옛 그림을 통해 동양의 정신과 사상을 알릴 수 있는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옛 그림을 소재로 삶의 이야기를 녹여낸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시작으로 『거침없는 그리움』『깊은 위로』로 이어지는 ‘동양미술 에세이’ 시리즈를 펴냈다.
『그림공부 사람공부』『좋은 그림 좋은 생각』『그림공부 인생공부』 등을 통해서는 옛 그림에 담긴 인생의 지혜와 가르침을 전해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조선의 글씨를 천하에 세운 김정희』『조선의 그림 천재들』『어린이를 위한 우리나라 대표 그림』 등 어린이를 위한 책도 함께 펴냈다.
2013년부터 『법보신문』에 ‘옛 그림으로 배우는 불교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그중 옛 그림 속 부처의 생애를 그린 『옛 그림, 불교에 빠지다』(2014)와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2015)를 출간했다.
블로그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http://blog.daum.net/sixgardn)를 운영하고 있다.
저자 조정육은 전남대학교 불문과,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동국대학교에서 박사를 수료했다. 고려대, 국민대, 성신여대, 서울과학기술대에서 강의했으며, 옛 그림을 통해 동양의 정신과 사상을 알릴 수 있는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옛 그림을 소재로 삶의 이야기를 녹여낸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시작으로 『거침없는 그리움』『깊은 위로』로 이어지는 ‘동양미술 에세이’ 시리즈를 펴냈다.
『그림공부 사람공부』『좋은 그림 좋은 생각』『그림공부 인생공부』 등을 통해서는 옛 그림에 담긴 인생의 지혜와 가르침을 전해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조선의 글씨를 천하에 세운 김정희』『조선의 그림 천재들』『어린이를 위한 우리나라 대표 그림』 등 어린이를 위한 책도 함께 펴냈다.
2013년부터 『법보신문』에 ‘옛 그림으로 배우는 불교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으며, 그중 옛 그림 속 부처의 생애를 그린 『옛 그림, 불교에 빠지다』(2014)와 『옛 그림, 불법에 빠지다』(2015)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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