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
국보 제55호인 팔상전(捌相殿)은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탑입니다. 더구나 목조 5층 건물은 팔상전뿐이고요. 상륜부를 포함하여 높이가 22.7m입니다.
팔상전으로 부르는 이유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고찰입니다.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충청지방 승병의 본거지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몽땅 불에 타버립니다.
팔상전은 임란 후 1605년 공사를 시작하여 인조 4년(1626) 벽암(碧岩)선사가 완공을 합니다. 보통 웬만한 목조 건물은 1년이면 공사가 끝나는데 22년이나 걸린 것은 전란 후의 어려웠던 경제사정 때문에 각 층마다 구조와 수법이 다릅니다.
적송 다듬은 하나뿐인 목탑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세계 최고의 문화재라고 극찬한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造彌勒半跏思惟像)의 재료는 한국에서 나는 적송(赤松)입니다. 따라서 이 사유상은 한국인이 만든 것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1천년을 견디는 좋은 목재가 있었기에 한국인은 거대하며 아름다운 목탑을 많이 세웠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은 탑신만 60m로 20층 건물 높이인데 그 위에 20m 높이의 상륜부가 있었으니 남아 있었다면 세계문화유산 중에서도 으뜸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목탑들은 몽고인과 왜인들의 침략 때 전부 불타 버렸고, 임진왜란 후 중건해 유일하게 남은 것이 법주사 팔상전(法住寺 捌相殿)입니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폭의 그림으로 묘사한 팔상도(捌相圖)를 봉안해 팔상전이라 부르는 이 탑은 우리나라 목탑의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국보 55호입니다.
5층 지붕 위에는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고, 상륜부 보주와 5층 추녀 네 귀를 쇠사슬로 연결해 놓았으며, 중심에는 굵은 기둥 하나가 5층 꼭대기까지 버티고 있고, 3층까지 천장이 트여 있습니다. 팔상전은 아래층 면적이 넓어서 안정감이 있고 장중합니다.
한국인이 전해준 기술로 지은 일본 목조탑의 깔끔하고 경쾌한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우리의 알타리 무씨를 일본에 심으면 '다꾸앙' 이 된다는 이야기를 떠올려 봅니다.
글.그림 김영택(펜화가)
[김영택의 펜화로 본 한국] (35) 속리산 법주사
보물 수두룩한 천하명승
팔상전·쌍사자석등·석연지 등 국보 3점 보관…
80㎏의 순금 입힌 청동미륵대불도 볼거리
1962년 어린 나이에 혼자 법주사 여행을 갔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당시 성능이 형편없던 고물 버스는 보은에서 법주사로 넘어가는 마티재 중턱에서 손님을 내려놓고도 힘이 부쳐 승객들이 밀어서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절 앞에서부터 속리산 문장대로 오르는 길가에 서있던 아름드리 금강송의 장대한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펜화가가 법주사를 여러 번 찾은 이유는 국보 제55호인 팔상전(捌相殿) 때문입니다. 화순 쌍봉사의 3층 목탑이 1984년 화재로 소실된 후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목탑입니다. 더구나 목조 5층 건물은 팔상전뿐이고요. 상륜부를 포함하여 높이가 22.7m입니다. 요즘 건물로 치면 7층 높이로, 높은 빌딩이 없던 1960년대에는 엄청 웅장한 건물로 보였습니다.
탑 중앙 심초석 위에는 5층 꼭대기까지 받치는 굵은 중심기둥을 세우고 그 주위에 4층까지 4개의 하늘 기둥을 세웠으며 12개의 기둥으로 3층 지붕까지 받치도록 하였습니다. 1층과 2층의 바깥 기둥은 별도로 세웠습니다. 5층 건물로 보이나 3층까지의 내부는 하나의 통층이고, 4층과 5층은 사람이 오를 수 없습니다.
팔상전으로 부르는 이유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폭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八相圖)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중심의 4개 기둥을 판자로 막은 네 면에 팔상도를 2폭씩 나누어 걸고 각 면 불단에 불상과 오백나한을 모셨습니다. 이런 구조로 팔상도를 차례로 보려면 탑의 내부를 한 바퀴 돌게 됩니다. 석가모니가 돌아가신 후 불상이 없었을 때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스투파-무덤)을 돌며 경배를 올리던 형태가 담긴 것입니다.
팔상전은 각 층의 면적이 위로 갈수록 급격하게 줄어서 매우 안정감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전통 목탑 본래의 모습은 아닙니다. 본래의 모습은 아래층과 꼭대기층의 넓이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직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입니다. 경주 남산 바위에 조각된 다층탑의 형태나 우리 조상이 일본에 세웠다는 목탑과 같았겠지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고찰입니다.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충청지방 승병의 본거지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몽땅 불에 타버립니다. 팔상전은 임란 후 1605년 공사를 시작하여 인조 4년(1626) 벽암(碧岩)선사가 완공을 합니다. 보통 웬만한 목조 건물은 1년이면 공사가 끝나는데 22년이나 걸린 것은 전란 후의 어려웠던 경제사정 때문이었겠지요. 그래서 각 층마다 구조와 수법이 다릅니다. 목수가 바뀌니 솜씨와 수법도 바뀐 것이지요. 우리 목조 건물이 대개 설계도면없이 지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법주사 팔상전은 황룡사 9층탑 등 여러 목탑이 몽골과의 전쟁과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 없어진 후 유일하게 남은 소중한 목탑입니다.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가 창건
펜화가는 팔상전이 보고 싶어 법주사를 찾지만 청동미륵대불(靑銅彌勒大佛)을 보려고 찾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1990년에 조성된 미륵불은 높이 25m 무게 160톤으로, 조성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불상이라고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2002년 순금을 입혀서 미륵불의 광채가 법주사 경내에 그득합니다. 순금을 3미크론(1000분의 3밀리미터) 두께의 얇은 판으로 만들어 건식도금공법으로 붙인 것입니다. 부엌에서 쓰는 알루미늄 호일의 두께가 17미크론이니 얼마나 얇은지 상상이 안가지요? 그래도 모두 80㎏의 순금이 들었답니다.
미륵대불은 1939년부터 조성불사가 시작되었으나 제대로 진척이 없던 것을 1964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대장과 신도들의 시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멘트로 만들어진 불상에 문제점이 생겨 철거하고 청동으로 다시 세웠습니다. 1990년 청동대불을 완성하고 점안식(點眼式)과 회향식(廻向式)을 하던 날 마른 하늘에 무지개가 3개나 뜨고 서광이 불상을 비추는 특이한 일이 있었답니다. 그날 참석하였던 많은 사람이 보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네요.
청동 미륵불은 시멘트 불상과 모습이 같으나 머리 위의 사각 보관이 없어지고 광배(光背)를 새로 달았습니다. 청동불로 바꾸면서 불상 기단부를 높이 8m의 원형 구조로 만들어 내부를 용화전(龍華殿)으로 꾸몄습니다. 본래 법주사에는 대웅전보다 큰 용화보전이 있었습니다.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건물로 내부에 높이가 4.8m가 넘는 청동 장륙상(丈六像)이 있었으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새로 짓기 위해 당백전을 만들려고 헐어갔답니다. 대웅보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큰 법당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좌불(높이 5.5m)이 안치되어있습니다. 화엄사 각황전, 무량사 극락전, 마곡사 대웅전과 함께 국내에 4개뿐인 2층 법당이지요. 대웅전이란 큰 영웅, 즉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곳인데 법주사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주존불이고 오른쪽이 석가모니불, 왼쪽이 노사나불이어서 법당이름과 다릅니다. 본래 이름이 대웅대광명전(大雄大光明殿)이었다는데 보물 제925호입니다.
보물 제916호인 원통보전(圓通寶殿)은 바닥이 정사각형으로 지붕은 탑에서나 볼 수 있는 사모지붕입니다. 흔치 않은 건물로 지붕꼭대기에 돌로 만든 절병통도 있습니다. 안에는 높이 2.8m의 큰 목조 관세음보살 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음상으로 1624년 원통보전을 세울 때 함께 조성된 것으로 봅니다.
절 마당엔 지름 2.7m짜리 무쇠솥
법주사에는 팔상전을 포함하여 국보가 3점 있습니다. 쌍사자 석등은 국보 제5호로 합천 영암사터의 쌍사자석등, 중흥사 쌍사자석등과 함께 국내 3개뿐인 쌍사자석등으로, 그 중 가장 크고 아름답습니다. 여느 절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짐작컨대 쌍사자석등은 큰 절에만 세울 수 있었나 봅니다.
국보 제64호인 석연지(石蓮池)는 돌을 깎아서 만든 연못입니다. 연꽃무늬를 덮은 받침돌, 구름무늬를 새긴 기둥돌, 연꽃을 3겹으로 새기고 보상화문을 화려하게 배치한 연지 위에 연못을 상징하기 위하여 꼭대기에 난간석을 둘렀습니다.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미, 조각의 솜씨가 뛰어난 걸작입니다. 그러나 난간에 파손된 부분이 많아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절 마당에는 큰 무쇠솥이 있습니다. 지름이 2.7m나 되는 솥으로 쌀 40가마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과거 법주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나를 짐작하게 합니다.
조선팔경 중 하나라는 속리산 법주사는 국보 3점과 보물 5점뿐만 아니라 절터 그 자체가 명승이어서 계절별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림ㆍ글ㆍ사진 김영택 펜화가
김영택 화백
세종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국가브랜드위원회 선정 한국의 대표작가.
한국펜화가협회 초대회장.
1945년 인천 출생
197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93년 국제상표센터(International trademark Center)에서 전 세계 그래픽 디자이너 54인에게 수여하는 '디자인 엠베서더(Design Ambassador) 칭호를 받음.
1994년 제 1회 벨기에 비엔날레 초청 작가.
2000년 국제 로터리 3650지구 '총재월신'에 펜화기행 연재.
2002년에서 2008년까지 중앙일보 ‘김영택의 펜화기행’,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중앙일보 ‘김영택의 펜화로 본 세계건축문화재’등 다양한 작품들을 연재.
2002년 통도사 주요 건축문화재 펜화 기록 작업.
2004년 인사동 학고재 첫 전시회 '펜화 기행 Ⅰ'전.
김영택 화백이 작품집 『펜화기행』을 출간했다(지식의숲).
경복궁·송광사·병산서원 등 전국의 문화유산 60여 점을 담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