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스스로 증득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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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2
무상경(無常經)
《원문》
(一)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當觀色無常, 如是觀者, 則爲正觀. 正觀者, 則生厭離; 厭離者, 喜貪盡; 喜貪盡者, 說心解脫. 如是觀 受·想·行·識 無常, 如是觀者, 則爲正觀. 正觀者, 則生厭離; 厭離者, 喜貪盡; 喜貪盡者, 說心解脫. 如是, 比丘! 心解脫者, 若欲自證, 則能自證: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 如觀無常, 苦·空·非我亦復如是.” 時,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역문》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다.그때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正觀]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곧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受)·상(想)·행(行)·식(識)도 또한 무상하다고 관찰하라.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은 바른 관찰이니라. 바르게 관찰하면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고, 싫어하여 떠날 마음이 생기면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며, 기뻐하고 탐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이것을 심해탈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이 해탈한 사람은 만일 스스로 증득하고자 하면 곧 스스로 증득할 수 있으니, 이른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아느니라. ‘무상하다[無常]’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자구해석】
<잡아함경>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394~468)가 번역한 것이다. 구나발타라는 범어 구나바드라(gunabhadra)의 음사(音寫)다. 그는 중인도 출신의 승려로서, 스리랑카를 경유하여 435년에 광동성(廣東城) 광주(廣州)에 도착했다. 그는 건강(建康) 기원사(祇洹寺), 동안사(東安寺), 형주(荊州) 신사(辛寺) 등에 머물면서 <잡아함경(雜阿含經)>·<대법고경(大法鼓經)>·<승만경(勝만經)>·<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등 52종 34권을 번역했다.
<잡아함경>의 제1권 제1경의 경명(經名)은 <무상경(無常經)>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경명은 <고려대장경>이나 <대정신수대장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글대장경>에 나오는 경명은 동국역경원에서 한역본(漢譯本)을 한글로 번역하면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무상경(無常經)>이라는 경명의 근거는 “편의상 경(經) 안에 있는 ‘올타남(올타南)’과 경의 내용을 의거하여 경명을 붙였다”고 각주(脚註)에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잡아함경>의 경명은 중요하지 않다. 같은 경명이 여러 차례 나오기도 하고, 어떤 경명은 경의 내용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올타남’이란 빨리어 ‘웃다나(uddana)’를 음사한 것으로 섭송(攝頌)을 말한다. 예로부터 삼장을 편찬한 뒤에 후대 암송자들이 기억하기 편리하도록 10개의 작은 경전[小經]들의 제목을 엮어 하나의 게송(偈頌)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웃다나(uddana,올타南)’라고 한다. 이를테면 <잡아함경> 1권, 7경 어색희락경(於色喜樂經)의 말미에 나오는 “無常及苦空 非我正思惟 無知等四種 及於色喜樂”과 같은 게송이 이에 속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라는 것은 모든 경전의 첫 머리에 나오는 정형구이다. 제1차 결집 당시 아난다(Ananda, 阿難) 존자가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들었다는 뜻이다. 이 정형구의 원어는 ‘에왕 메 수땅(evam me sutam)’인데, 직역하면 ‘내게는 이렇게 들렸네. (Thus has been heard by me)’이다. 전형적인 수동태 문장이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불교철학사>에서 “비실체론과 근본적인 경험론이라는 자신의 철학으로 말미암아, 붓다는 능동태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수동형이나 부정과거나 과거분사 등을 주로 구사하였는데, 이것은 간다라어(Gandhari)와 같은 북부 지방의 속어인 쁘라끄리뜨(Prakrit)나 빨리(Pali)로 남아 있는 경전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위국(舍衛國)’은 빨리어 ‘사왓티(Savatthi)’ 혹은 산스끄리뜨 ‘슈라와스띠(Sravasti)’를 음사(音寫)한 것이다. 사왓티는 붓다 당시 16대국 가운데 하나였던 꼬살라(Kosala)국의 수도(首都)였다. 중국의 역경가들은 사왓티가 국가이름 인줄 알고 사위국(舍衛國)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사왓티는 도시이름이므로 사위성(舍衛城)으로 번역해야 옳다. 사왓티는 지금의 ‘사헤뜨-마헤뜨(Sahet-Mahet)’로 알려져 있다.
범어 ‘슈라와스띠’는 사위(舍衛), 실라벌(室羅筏), 실라벌(室羅伐), 사파제(舍婆提), 실라벌실저(室羅伐悉底), 사위국(舍衛國), 사위대성(舍衛大城), 사파제성(舍婆提城) 등으로 음사되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국명 ‘신라(新羅)’와 그 수도 ‘서라벌’은 범어 ‘슈라와스띠(Sravasti)’의 음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도시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범화대사전(梵和大辭典)>에 의하면, 고대 왕인 Sravasta가 Sravasti 시(市)의 창설자(創設者)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팔리고유명사사전>에 의하면, “이 도시가 Savatthi라고 불렸던 것은 그곳에 Savattha라는 성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 다른 전통에 의하면, 그곳에 큰 시장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각자 다른 사람에게 “무슨 물품을 갖고 있느냐?(Kim bhandam atthi)”라고 물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Sabbam atthi)”라고 대답하였다. 즉 ‘삽방아티’라는 대답이 곧 ‘사왓티’가 되었다고 한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은 ‘Jetavana Anathapindikassa arama’를 번역한 것이다. 제따와나(Jetavana)는 ‘제따(Jeta, 祇陀) 태자의 동산[祇園]’이라는 뜻이다. 아나타삔띠까(Anathapindika)는 ‘외로운 이를 돕는 자[孤獨園]’라는 뜻으로, 수닷따(Sudatta, 須達) 장자(長者)의 별명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널리 보시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아라마(arama)는 ‘원(園)’ 혹은 ‘원림(園林)’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기수급고독원’은 ‘제따 태자의 동산에 아나따삔디까 장자가 세운 원림’이라는 뜻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Jetavana Anathapindikassa arama’를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 번역하고, 줄여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 부른다. 이 승원은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붓다와 그 제자들이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모든 편의시설들을 지어서 승단에 기증했다. 이 승원 건립의 주역은 제따(Jeta) 태자와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장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닷따 장자가 이 승원을 건립하기까지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는 제따 왕자로부터 금 조각을 표면에 덮는 값을 치루고 제따 숲을 샀다. 그리고 그 동산에 사원을 건립하여 승단에 기증했다.
붓다는 “나의 제자인 우빠사까(Upasaka, 優婆塞) 중에서 보시제일(dayakanam yadidam)은 수닷따(Sudatta), 즉 아나타삔디까 장자이다”라고 격찬했다. 또한 제따 태자는 당시 꼬살라국왕인 빠세나디(Pasenadi, 波斯匿)의 아들이었다. 붓다는 한역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3, 제6 청신사품(淸信士品)에서 그를 “성스러운 무리를 받들어 공양하되 뜻이 언제나 평등한 이(供奉聖衆 意恒平等)”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빠세나디의 왕위를 계승한 배다른 형제 비두다바(Vidudabha, 毘琉璃王)가 석가족을 멸망시킬 때,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따 왕자를 죽여 버렸다.
‘세존(世尊)’은 붓다의 열 가지 호칭[如來十號] 가운데 하나다. 세존의 원어는 ‘바가완뜨(bhagavant)’다. 이 호칭을 간혹 ‘박가범(薄伽梵)’으로 음사하기도 했다. ‘바가완뜨’를 ‘Blessed One’(축복받은 자)으로 영역(英譯)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붓다는 누구로부터 ‘축복받은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가완뜨’는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세존(世尊)’이라고 한역한 것은 탁월한 번역이다. 세존은 글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講義(강의)>
이 경의 핵심 내용은 오온(五蘊),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 무상하다고 관찰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해야 바른 관찰이며, 이렇게 바르게 관찰해야 모든 집착으로부터 떠나게 되어 마음이 해탈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스스로 후생의 몸을 받지 않을 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어져야 비로소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역 아가마(Agama, 阿급摩, 阿含)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빨리어(Pali, 巴利)로 전승되어 온 니까야(Nikaya, 尼柯耶)와 대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경에 대응하는 니까야는 Samyutta-nikaya(相應部), 제22 Khandha-samyutta(蘊相應), 제2 Aniccavagga(無常品), 12. Anicca(無常), 13. Dukkha(苦), 14. Anatta(無我)이다. 그러나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이 세 개의 경전이 <무상경>이라는 하나의 경전으로 압축되어 있다. 세 개의 경전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일 것이다. <니까야>의 세 개의 경전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色(rupa)은 무상하다. 受(vedana)·想(sanna)·行(sankhara)·識(vinnana)도 또한 그와 같다. (색은 괴로움[苦]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그와 같다. 색은 자아가 없다[無我]. 수·상·행·식도 또한 그와 같다.) 이와 같이 보아서 색·수·상·행·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싫어하여 떠나면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겨나서 ‘다시 태어남은 파괴되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다시는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그는 분명히 안다.
<니까야>에서는 여기서 경전이 끝난다. 그러나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무상하다[無常]’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如觀無常, 苦·空·非我亦復如是. 時, 諸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라는 부분이 추가되어 있다. 즉 <니까야>의 세 경전을 단 몇 줄로 압축하여 하나의 경전으로 만든 것이다.
이 경에서 문제되는 부분은 <니까야>에 없는 추가된 부분, 즉 “‘무상하다[無常]’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苦]이요, 공하며[空], 나가 아니다[非我]’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如觀無常, 苦·空·非我亦復如是.)”라는 대목이다. <니까야>에서는 분명히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를 바르게 관찰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가마>에서는 무상(無常)·고(苦)·공(空)·비아(非我)를 관찰하라고 되어 있다. 즉 <니까야>의 ‘무아(anatta)’라는 단어 대신에 <아가마>에서는 ‘공(空)·비아(非我)’라는 단어가 삽입되었다.
이 때문에 불교의 ‘무아설’을 해석함에 있어서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니까야>에 없는 ‘공(空)·비아(非我)’라는 단어는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한역 <잡아함경>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 전승해 온 범본(梵本), 즉 산스끄리뜨(Sanskrit)로 기록된 <패엽경>을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까야>에 ‘공(空, sunnata, Sk. sunyata)’이라는 개념이 나타나지만, 이 경전에 나타나는 ‘공(空)·비아(非我)’라는 단어는 설일체유부의 관점이나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아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무아설(無我說)을 어떤 이유로 다르게 해석할 필요성을 느끼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은 아닐까?
끝으로 이 경에 나오는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섰으며, 할 일은 이미 마쳐 후세의 몸을 받지 않는다.(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作, 自知不受後有.)’라는 대목은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정형구(定型句)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 산재(散在)되어 있다.
· 마성 스님은...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마하출라롱콘라자위댜라야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및 팔리문헌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신행공덕』(불광출판부, 2004), 『마음 비움에 대한 사색』(민족사, 2007), 『사캬무니 붓다』(대숲바람, 2010), 『왕초보 초기불교 박사되다』(민족사, 2012)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 팔리문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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