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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으로간 푸른 눈의 승려, 쿠마라지바








KBS-NHK-CCTV 공동제작 新 실크로드
제 5편 동으로 간 푸른 눈의 승려


쿠마라지바(Kumarajiva, 鳩摩羅什, 구마라습, 구마라집 / 344 ~ 413)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인도의 승려. 구자국(龜玆國, 쿠차, Kuqa)에서 인도의 왕족 구마라염을 아버지로 구자국 왕의 누이동생 기바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처음에는 소승을 배우고 뒤에 대승불교에 능통했다. 401년에 중국 장안(長安)으로 와서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다.

〈성실론(成實論)〉•〈십송율(十誦律)〉•〈마하반야경〉•〈묘법연화경〉•〈아미타경〉•〈중론〉•〈십주비바사론〉 등 경률 74부 384권을 번역한 대표적 역경승이다.

 특히 삼론(三論) 중관(中觀)의 불교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이를 확립하였으므로 중국•한국•일본에서는 그를 삼론종의 조사(祖師)로 삼고 있다. 3천명의 제자들 중에서 도생(道生)•승조(僧肇)•도융(道融)•승예(僧叡)를 습문(什門)의 사철(四哲)이라 한다. 




· 관련 자료
· 쿠마라지바 - 일지 - 月刊 海印 (1991년 07월 113호)


쿠마라지바


번뇌(煩惱)의 성자(聖者)

 쿠마라지바는 자신의 사생활(私注活)에 대한 변명으로 연꽃의 비유를 들고 있다. 연꽃의 비유는 그 자신의 변명이기도 하지만 그가 번역한 「법화경(法華經)」의 근본사상이기도 하다. 「법화경」이라는 제목은 바로 대승불교의 깊은 심연을 연꽃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백악(百惡)올 구비한 육체를 갖고 있다. 육체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염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연꽃과 같이 정화(爭化)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번뇌 속에 열반이 었다는 「법화경」의 사상이 바로 그 문제를 제시하고 답변한다. 하지만 번뇌란 무엇이라고 단언하기가 몹시도 어려운 말이다. 그래서 불교는 백팔번뇌라는 엄청난 번뇌의 리스트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번뇌는 혼히 죽음에 이르는 병(病)이라고 말해지며 도피하려 하면 할수록 그 내면의 괴물은 더욱 강한 힘으로 우리를 추적해 온다. 달리 방법은 없는 것일까? 대승불교는 말한다. “그대여 ! 번뇌를 끊으려고 애쓰지 말라. 번뇌는 오히려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煩腦成就 得入提).”

 특히 「유마경」은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라고 명백히 선언한다. 「유마경」의 이 구절도 그렇지만 쿠마라지바가 번역환 경전에는 번뇌 긍정의 사상이 많다. 번뇌는 끊어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꽃피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깨달옴이란 결국 번뇌 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니겠는가?

 쿠마라지바의 옛 스승 비마라차가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그는 쿠차국 시절 젊은 쿠마라지바에게 계율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스승은 제자의 출세 소식을 듣고 그를 보러 온 것이다. 스승 비마라치는 물었다.

 “그대는 한토(漢土)와 큰 인연이 있구나. 참으로 훌륭하도다.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편다는 것은 그래 그대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스승은 이 제자를 몹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제자의 제자라면 역시 나의 제자라는 생각에 스승은 득의 만만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는 침통하게 말한다. 

 “중국에는 지금까지 불교의 기본경전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미흡하나마 새로 경전과 논서를 대량으로 다듬고 중국의 언어로 옮기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삼천여 명의 제자가 모두 저의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만 저의 무거운 업장으로 해서 스승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열 명의 여성과 함께 생활하는 그로서는 계율의 스숭 앞에서 상당히 첨통한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의 침통한 변명은 단순한 변명만은 아니다. 불교는 학문보다도 열정한 수행, 계율의 준수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 자신 스승으로서 존경받지 못한다(但什累業障 故不受i敎耳)라는 자책 속에는 자신의 깊은 업장에 대한 절망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비마라차는 슬픔을 느꼈다.

 이제 쿠마라지바는 그의 제자가 아니었다. 쿠마라지바는 자신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외견(外見)상 쿠마라지바는 최고봉에 도달한 불교사상가였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형언할 수 조차 없는 종교적 절망감어 깃들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번뇌의 성자(聖者)였다. 한 인간의 생활은 바로 그 사장이다. 그리고 그 사상이 그 인간의 생애에 방점을 찍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숨겨진 단층 어딘가에는 쿠마라지바의 생애와 사상에서 표출되고 있는 성(聖)과 속의 갈등이 묻혀 있다고 보고 싶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생애와 사상의 광대(廣大)한 화해를 성취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확실히 남다른 인생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현실과 부정확한 ‘나’라는 몇에 사로잡혀 있는 소세계(小世界)의 우리가 자신들의 인생에서 그 화해를 성취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한가닥만이라도 풀고 죽음헤 이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좋을 것이다.

 한 개인으로의 인간은 결국 소멸하게 되어 었다. 그렇지만 인간은-성(聖)과 속(俗), 어둠과 빛이 서로 뒤섞이고 서로 이동하는 현설 속에서만이 그 자신의 운명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전불교(經典佛敎)의 완성을 통해서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수많은 정전 중애서 「반야경) ·「법화경) ·「유마쩡) ·「아미타경) 등은 동아시아 민중들의 절대적인 애호와 신뢰를 받아왔다. 말하자면 그는 경전의 최장기 베스트셀러를 번역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대가로 지금까지 우리의 미숙한 평가를 받고 었는지도 모른다. 쿠마라지바가 보여준 탁월한 불교이해와 번역은 바로 그 자신의 안간적이며 종교적언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확실히 탁월한 천재와 치열한 신앙을 갖고 었었으나 또 한면으로 그는 절망자(總望者)였다.

 그는 계속되는 전란으로 혼탁해진 그 자신의 시대와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절망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세계는 이미 오염된 장소였다. 그래서 그는 경전불교(經典佛敎)의 완성을 통해서 자선이 동경하는 이상적인 불교, 청토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다. 그는 경전불교의 완성을 통해서 인간의 슬픔과 절망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쿠마라지바에게 있어 경전(經典)이란 바로 사상의 정토였던 것이다. 사상이라고 하는 환념의 다발이란 현실 앞에서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소세계(小世界)의 덫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은 사상의 회랑을 통해서만이 그 소세계에서 탈출을 꿈꿀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그토록 사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확실히 사상이란 정신의 벽돌로 쌓아올린, 환해는 보이지만 실물이 아닌 신기루와 같다. 우리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정토불교의 경전을 대할 때마다 그가 꿈꾸었던 사상의 정토, 깊은 절망을 체험한 성자(聖者)의 교만함이 없는 따뜻한 불교이해를 읽는다.


「용수보살전」과 「제바보살전」의 성격

 쿠마라지바에 의해 번역되었다고 전해지는「용수보살전」과「제바보살전」이 있다. 용수(龍樹, NagaIjma)와 제바(提婆, Arya-Deva)판 모두 공(空)의 불교인 중관파(中觀派)의 조사(祖師)들이다.

 이 두 문헌은 쿠마라지바의 번역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문현연구의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이 두 전기에는 젊은날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쿠마라지바가 겪었던 내면적인 갈등과 파토스가 솜씨있게 그려지고 있다.

 젊은날의 용수를 생각해 보자. 그는 브라만가의 출신으로 운부신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이성(理性)에 대해서도 오만했던 그는 친구들과 함께 쾌락에 목숨을 걸었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침내 쾌락이 고통과 재앙의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불교탐구자의 길을 간다. 말하자면 회심자였던 것이다. 용수는 불교탐구자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의 자만심과 계속 싸워야 했다. 또한 그가 쾌락을 손에 쥐는 수법으로 사용했던 투명인간의 비술(秘術)과 같은 이야기는 절묘하기조차 하다. 쿠마라지바는 무엇 때문에 이련 이야기를 자선이 그토록 존경하는 선배의 전기(傳記)에 써 넣은 것일까? 투명인간의 비술은 단순히 이야기의 흐름을 엮기 위한 것은 아니다. 아주 절묘한 트릭이다.

 많은 이야기를 감추고 있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이 글에서 더 길깨 쓰지 않으려 한다. 단지 독자의 현명한 안목에 맡기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우리 현대인 또한 모두 투명인간의 마법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 우리는 모두 투명인간이 되어 일을 저지르며 다니고 있다는 점을 말해 둔다.

 재바의 전기 또한 용수의 전기와 같이 기묘하다.

 젊은날의 제바는 자만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힌두의 신전에 들어가 신상(神像)의 눈을 도려냈다. 신(神)과 맞선 것이다. 결국 제바 자신도 그 대가로 환쪽 눈을 잃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외꾸눈 제바라고도 전해진다. 그는 전리가 아닌 허위의 세계에 대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올 걸고 싸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바의 불 같은 성품은 마침내 적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칼을 꼽는 암살자를 용서하고 도망기는 길까지 가르쳐 준다. 그리고 억올해 하며 복수를 다짐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법칙은 공(空)이다. 누가원수이며 누가 적인가? 누가 죽이며 누가 죽임을 당하는가? 해침을 받는자도 없으며 또한 해치는 자도없다. 지금 그대들은 미망의 독약에 취해 있다.

 그대들은 지금 부질없는 복수섬에 집착하면서 여러가지 까르마를 짓고 있다. 부디 깊이 생각하여 그를 추적하거나 슬퍼하지 말기를 바란다.”제바는 이 유언에서 공(空)의 사상가로서 완벽한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달관(達觀)을 보인다. 이처럼 쿠마라지바는 자신의 인생관을 「용수보살전」과 「제바보살전」에 나누어 표백(喪白)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은 절망한 천재의 정신세계를, 또 다른 한쪽에 는 허위의 세계를 용납치 못하는 열렬한 전리탐구자 의 세계를 그려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투명하도록 따뜻한 미옴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다.

 대승불교에 는 두 가지의 얼굴이 있다. 유아의 음식과 성인 (成A)의 음식이 다르듯이 대승불교는 우자(愚者)와 현자(賢者), 준비가 안된 범인과 보살의 행법(行法)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상대적인 진리와 초월적인 진리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 대승불교의 기본입장이다. 대승불교는 그렇게 싸구려 재고 품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흔하게 “대승적, 대승적”이라고 말하지만 대승불교는 적어도 인류의 예지가 도달한 최고의 종교적 자각, 정교한 교의체계, 실천의 행법(行法)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이다.

 그만큼 대승불교의 인간응시는 깊고 치열하다. 쿠마라지바의 불교에서 우리는 대숭불교의 두 얼굴을 발견한다.

나는 우매하고 잘못된 인간이었다.

413년. 쿠마라지바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무슨 까닭이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비범한 제자 승조(僧肇, 384-414)는 스승의 죽음을 갑작스러운 변이었다고만 적었다. 쿠마라지바는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있다.

“진리의 가르침은 매우 거룩하지만 나는 마음을 다해서 그 길을 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후세의 사람들이 이 인간을 어떻게 말하려는지? 나는 우매하고 잘못된 인간이었다. 그러나 내가 번역하여 전한경전은 충실하다. 전부 삼백여 권의 경론. 오직 십송율(十調律) 한 부(部)만이 삭제가 심하나 그 본지(本旨)는 반드시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여러분과 함께 번역한 경전이 후세까지 널리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서 읽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고하나니 만약 나의 번역에 오류가 없다면 나의 시신을 화장한 후에도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

이때가 413년 4월 13일. 인디아와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오고가며 파란 많은 생애를 보내면서도 불멸의 겸전불교(經典佛敎)를 완성한 불교사상가 쿠마라지바는 장안(長安)에서 입적(入寂)했다.

그가 경전의 번역사업을 주재하던 소요원(避훨훨)에서 그의 시신을 불사르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혀는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의 제자 승조는 장례식에서 다음과 같이 스승을 추도하고 있다.

오호! 애재(哀歲)라 
진랴의 스승이 서쪽으로 가셨도다 
신령스런 말씀이 동쪽에서 꺾에었구나 
나 이제 눈 먼 아들이 되어 
홀로 헤매게 되었으니 
망극할 뿐이다 




 일지스님은 1974년 백양사로 출가하여 해인사 강원과 율원을 수료한 뒤 서옹선사께서 선불교 수업을 쌓았다.
한때〈선사상〉〈월간법회〉의 편집 일을 하기도 했으며, 낙산사 교무를 역임했다.
역서로는「임제록」을 비롯한 여러권과 ‘현대중공의 불교인식’이라는 논문으로 재1회 해인상〈학술부문〉을 수상했다.
그밖에 논문으로 ‘임제선사상의 사적구조’ ‘한역 불전 속의 도가사상’ ‘초기불교의 재인식’ 등 여러 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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