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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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기획 시리즈 - 도올, 인도를 만나다 제 19강 여래장, 대승의 종점








제 19강 여래장, 대승의 종점

 감사합니다. 이렇게 점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녹화장에도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난 번에 대승과 소승, 설명하는데 미진했던 부분에 있어서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소승과 대승을 우리가 우선 나누는 것은, 소승은 출가자들 믹슈라고 하는 출가자 중심의 불교운동이였다. (bhiksu(비구) : 걸식하는 남자 bhiksuni(비구니) : 걸식하는 여자)

 대승은, 철저하게 재가신도들, 일반신도들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였다. 대승운동 이끌어간 사람이나, 모여든 사람이나 대중들. (소승 : 소수 출가자집단의 종교운동 대승 : 다수 재가자집단의 종교운동 모두 재가신도들, 일반인들 중심.) 그러다 조직화되니까, 그들 중에서도 출가집단이 나오게 되었죠. 승려들이 우리나라에도 따로 있는 것이지만, 사실 선속의 구분이 없다. 대승도 나중에는 재가불교에서 출가불교로 바뀌어갔다. 그러나 대승은 오로지 재가자 일반시도들의 종교운동이었다는 원래 성격을 시종일관 일탈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인간적 채취가 이어져 내려왔잖아. 직접들은 사람도 있고, 그러니 더 잘 이어져왔지만, (소승 : 비형상주의 : 탑중심 대승 : 유형상주의 : 불상중심) 시간 오래되니까 불상보니까 경도가 되죠. 점점 신비화 되다보니까, 정형화. 나는 지금도 우리가 앞으로 불교에서도 조금 부처님 모습을 조금 실제적 모습으로, 변형시킬 필요가 있어요. 우리나라 20세기 불상조각은 가장 창조성이 결여된 모방작품의 시기에 속한다. 이제부터는 보다 창조적인 부처님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 우리 신라부터 고려 상보면, 점점 한국사람으로 그린다고. 그런 운동이 일어나자 전부 불상중심. 소승은 철저히 진리를, 추상적 진리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되지만, 대승은 아무래도 신앙중심. (소승 : 진리중심 대승 : 신앙중심) 부처님에 대한 귀의. 그래서 삼보에 귀의. 부처님께 귀의함으로 신앙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된다. 극단적으로 가면 정토까지 간다. 아미타불해서, 왜 염불 외는 것. (정토신앙 -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할 것을 가르치는 종교운동.) 아무것도 안해도, 염불만 외면 구원을 얻게 된다. 정토신앙은 오로지 아미타불(무한한 수명의 부처님)의 이름만 계속 외워도(=염불)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교가 거의 기독교와 차이가 없어지는 거에요. 현실적인 불교라는 건, 불교 전체역사가 세계종교 모든 모습을 다 가지고 있어요. 미륵신앙이나, 예수 재림한다는 거나, 뭐가 다름이 있어요. 대중신앙이 되어버려요. 미륵신앙 -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천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강한다는 미래불의 신앙. 이런 위험성이 있어요. 자연히 대승으로 가면서, 불교 성격의 변화가 일어나요. 대승운동은 대중운동이다. 대중화에 따른 여러 부작용은 불교의 본래 모습을 상실케 만들 수도 있다. 자연히 대승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거는 아니다. 잘못가고 있다. 막자는 게 반여사상이다. 그거를 막자는 거에요. 반야사상은 형상주의, 초월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기원전후세기부터 생겨났다. 너무 멀어졌다. 탑중심 불교에서 불상으로 가면서, 엉청난 변질. 불상, 이건 원래 불교의 모습이 아니에요. 대반경, 부처님 당부모습에서 멀어졌어요. 무조건 대승 좋고, 소승 나쁘다. 여기서 벗어나야 되요.

 대승에서 너희가 곧 부처다. 이것을 극한까지 가면, 선이 되요. (선 : 대승불교사의 극한) 선이라는 건, 견성성불이라고 하잖아요. (견성성불 : 너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보기만 하면 너는 곧 부처가 된다.) 견성. 부처님. 견성하십시오. 이 말? 니가 가지고 있는 본성이 곧 부처라는 것을 안다라는 거에요. 니가 곧 부처라는 걸 안다라는 거에요. 여기에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그러면 여기에 문제가 복잡. 이왕 나온 김에 가지고 이야기를 해봐요. 대승운동은 부처님을 니가 곧 부처다. 법 중심이 아니라, 불 중심. 계율을 다 지킬 수 없으니까 자연히 자비를 희구하게 된단 말이야. 소승 : 법중심. 계율중심 대승 : 불중심. 자비중심. 부처님에 접근하기 쉬워야 하잖아요.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감내하기 어렵단 말이에요. 대중 운동이 되다 보니까, 니가 곧 부처다. 이건 카필라 성에 있던 왕자 그 부처가 아니라. 바로 네가 부처다. 바로 네가 부처다. 일반 사람, 도리가 있으면, 새로운 보살개념에게는 나의 본성에 불성이 내제하고 있다는 믿음을 전제. 소승의 보살은 수기를 받는 선택된 존재였다. 그러나 새로운 대승의 보살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불성이 내재한다는 신념이 필요했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게 있어요. 성철스님 돈오돈수. 원시불교 원래, 오와 수중. 수가 중요. 닦음. 원시불교사상의 본질은 오보다는 수에 있었다. 닦음의 문제라는 건, 니가 먼저 부처다라는게 전제되어 있어요? 안되어 있어요? 부처가 되려면 오랜 세월을 닦여야 되잖아요. 오랜 세월 거치는 과정이, 점진적이잖아요. 그러니 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수 : 불성의 전제가 없다. 오 : 불성의 전제가 있다.) 대승은 점을 못 찾아요. 오랜 세월? 그런 안 믿어버리지. 그러니까, 대승운동으로 가면, 기본적으로 돈이되야 되요. 금방된다. 그러니 믿어라. (점 : 점차적으로 : 소승의 정신 돈 : 갑자기 : 대승의 정신 이상의 논의는 엄밀한 논의가 아니라 방편적 논의다.) 믿음에 대한 생각이 강하게 나타난 단 말이에요. 금방된다는 데는, 네가 400년 전 카필라성 왕자 싯달타가 아니라, 니가 싯달타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뭐냐? 사람은 본성은 본래 청정하다. - 그런데 번뇌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악업에 염, 물들여져 있기 때문에, 내가 싯달타라는 것을 못보는 거지. 그것만 걷어내 버리면 싯달타다. 이해되시죠? 물든 것만을 벗어버리면, 니가 부처다. 대승의 보살사상 중요한 것. 이렇게 가면, 나의 본래의 견성. 성이라는 게 곧, 불성이 되잖아요. 성철스님도 이런데에 대해서 반성이 없이, 그냥 절대적으로 제기하시는데,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니가 곧 부처다라고 전제를 하게 되면, 나는 본래로서 부처가 있게 되잖아요. 내가 있고, 곧 부처인데, 욕망에 가려져 있다. 그것만 걷어내면 곧 부처다. 이건 다시 아트만으로 가잖아요. 불성의 이론은 또 다시 아트만으로 빠질 위험성을 잉태한다. 여기 굉장히 이러한 이론이 강력한 거 같지만, 굉장한 위험이 있다고. 대승의 현실적 모습은 무아론을 위배하고 다시 아론을 주장하는 경향을 노출시켰다. 잠깐 가려있는 거다. 걷어내면 부처다. 위험한. 이 불성론을 성철스님의 돈오돈수론은 반불교적인 이론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래장경 - 여래장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나오는 경전. 법거에 의해 여래장이라고 불렀어요. 이해가 가십니까? 카타카타 바르바. 여래장(Tathagata-harbha) 일체의 중생은 여래를 태로서 가지고 있다. -여래장경- 이말은 뭐냐면, 여래가 될 수 있는 여래의 태아가 내게 있다. 나는 여래의 태아를 가지고 있다. 그건 종자라고 하면 안되요. 여래의 가능성을 나는 가지고 있다. 함장하고 있는 존재다. 여래장이라고 하는 건데, (대승기신론 - 여래장론을 체계적으로 논술한 매우 특이한 논서) 대승기신론, 불행하게도 산스크리트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요. 범본이 사라져서 위서의 논란이 있으나 인도에서 성립한 것이 확실하며 550년경 진제가 번역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 성립한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 있는데, 산스크리트로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한 550년경에 진제라는 사람이 대승기신론이라는 게 뭐에요? 큰 대승 운동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게하는 론이란 말이야. 대승기신론이라는 것은,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저번에 윤회의 주체로서 식이 아라야식 유식의 알라야식론과 대승기신론의 여래장론은 동시대에 서로 영향을 주면서 태어난 사상임이 분명하다. 알아야식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거에요? 나쁜 거에요? 기본적으로 망식이에요. 언제든지 인간 의식 바닥이라고 해도, 끊임없이 업을 지어내는 알라야식 : 미망식 이것은 전환시켜야 할 것이지, 알라야식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어요. 이에 반해서, 여래장은 망식이 아니죠. 좋은 거죠. 여래장 : 청정식 여래장, 알라야, 역사적으로 대비되는 개념 알라야식 : 오염된 것이며 소실되어야 한다. 여래장 : 오염되지도 않고 소실되지도 않는다. 알라야식, 기나긴 역사의 고리에서 알라야에 있는 나쁜 종자들을 없애야 할 거잖아요. 전환을 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런 일월에서는 깨닳음의 계기가 바깥에서 밖에 올수가 없어요. 알라야식연기에서는 깨달음의 계기가 밖에서 올 수 밖에 없다. 나의 존재는 알라야식이고, 이건 망식이다. 이걸 깨는게 바깥에서만 와야 하잖아. 여래에서는 그게 아니라, 내가 구유하고 있는, 내가 붓다니까, 깨닳을수 있잖아요. 대승기신론에 가면, 여래장론 특징이 염정상자 = 염정호훈 그러니까 그 여래장론은 여래장이 절대적으로 깨끗한 것으로, 나의 본성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여래장 자체가 물들 수 있다. 여래장경에서는 여래장의 오염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은 여래장 그 자체가 오염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여래장연기라는 말이 생겼다. 여래장 자체가, 이게 대승기신론의 독특한 것. 자체가 더럽게 물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염과 정이 훈습한다.

 왜 여래장 문제가 되냐면, 바로 대승기신론의 획기적인 해석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불교를 고차원으로 중흥시킨 사람이 바로 원효라는 사람이에요. (원효(617-686) - 신라의 고승. 속성은 설씨. 방대한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대표적인 저작 중의 하나가 바로 대승기신론소, 대승기신론별기 등이다.) 원효가 왜? 우리가 지금, 한국 사람들 21세기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 부끄럽게 생각해야되. 그 옛날에 고민한 문제 수준, 깊이 정보의 양, 문제 의식을 21세기 살고 있는 우리가 쨉도 안되는 거에요. 원효라는 사람이 오기까지 기나긴 인도사상 문제가 소승부터 대승까지 인류철학사의 모든 문제가 원효에게 와 있는 거에요. 원효 대승기신론별기 같은 것 보면, 정말 치밀하게, 우리는 원효를 고대의 사상가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가해서는 아니된다. 원효의 문제의식은 심도와 범위에 있어서 컨뎀포러리 사상의 모든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원효같은 분의 책을 읽으면, 유불도에 박학하다고, 내 앞에서 뭐라 할 사람 없을 거에요. 그런데 원효에게 비하면, 쨉도 안된다고. 노자 도덕경을 꽤고 있어요. 불경의 모든 것을 다 알뿐 아니라, 유가 경전 모두 통달하고 있단 말이야. 그런데 여래장론을 가지고 싸우고 있단 말이야.

 가장 핵심은 일심이문이라는 거거든요. (일심이문 - 대승기신론 자체의 논의지만 원효가 가장 중시한 이론이다.) 여래장론이 이게 염정이든 염이든 이것이 한 마음이라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일심인데, 일심에는 진여문과 생멸문이 다 같이 있다는 거에요. 일심 - 진여문, 생멸문 여래장을 볼 적에, 진여의 세계나 생멸의 세계나 결국하나라는 거에요. 제법의 염,정과 진,망은 둘이 아니요 하나다. 하나이기 때문에만 마음이다. 마음은 언어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억지로 한마음이라 말할 뿐이다. - 원효 - 진여 생겨나고 멸하는 이런 세계에서 알아야식이 그러한 세계죠. 생멸문. 그러나 진여라는게 생멸의 배면에 있는 아주 변하지 않는 같은 진정한 내 마음. 변하지 않는 마음같이 보이잖아요. 생멸, 진여. 하나는 본체적인 것. 현상적인 걸로 봐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마치 생멸하는게 있는, 배경에 진여 진여 : 항상 같다 : 본체론 생멸 : 생하고 멸한다 : 현상론 이러한 이원론은 성립할 수 없다. - 원효 - 진여에 아주 깨끗한 고요한 완벽한 여여한 마음이 있다라고 이것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면 불교가 아니다. 그러면서 비유가, 파도가 바람이 불면 출렁이지만, 잦고나면, 고요한 수면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파도가 칠 때나, 안 칠 때나 같은 마음이잖아요. 바람이 없어지면 파도 또한 없어진다. 그렇다고 물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람과 같은 우리 마음의 무명 또한 그러하다. -대승기신론- 단지 어떤 바람이란 계기가 있었을 뿐이지만, 다를 순 없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생멸문으로 여래장 이야기하는데, 어려운 건 이야기하지 말고,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으로 불성이지, 내가 부처다라는 오만을 가지면 안 된다. 이건 아트만론이란 말이에요. 여래장론은 성불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며, 나의 본성이 곧 부처임을 주장하는 존재론적 명제가 아니다. 원효의 일심사상은 여래장의 실체화를 거부한다. 그러니까 여기 중요한게 대승운동의 불성론은 우리의 실천적인 실천론적으로 이해해야지 존재론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대승의 여래장(불성)론은 실천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존재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뭐냐면, 원효 수준도, 일심이라는 것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 이건 반드시 실천을 위해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대승의 신을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 말씀하신 것뿐이다.

 왜 이런 말을 했겠어요? 원효께서. 당시 원효는 삼국통일 직후 태어난 사상가. 백제, 고구려, 신라 각기 다른 마음 가지고 산 사람 모였어요. 우리 민족 새로운 나라 세워서 가려고 하는데, 통일된 마음을 제시하려는 것이 대승이나 일신으로 우리나라 이데올로기를 삼아야 되겠다는 것으로 노력하고 사신 분이라는 거에요. 원효의 일심사상은 신라의 삼국통일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제공했다. 우리 원효하면, 그냥 불교 고승. 그게 유치하게, 그런 분들이 왜 그렇게 불경을 파고 공부하겠어요? 이것으로 삶의 문제를 만나는 거에요. 요석공주와 결혼하고, 진여의 삶처럼. 생멸의 삶. 최초 국가 건설 되었을 때, 일심사상으로 만들어 간 분이란 말이에요. 원효는 진여의 삶과 생멸의 삶을 동시에 일심으로 구현했다. 원효같은 분들이 있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된 거에요. 그냥이 아니에요. 사상가들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우리 밑바닥을 만들어놓은 거에요. 그걸 모르고 그냥 제각기 살아서 되겠느냐. 그 성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있으면 안된다는 거에요.

 중국에서 특히 맹자의 성선론과 결합해버린단 말이에요. 불성론은 중국에 들어와서 맹자의 성선론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선험론적 맥락에서 이해된 것이다. 그래가지고 맹자의 성선론으로 이해되어서, 인간은 본래 선한 것이다. 내가 붓다다. 내가 구름만 걷히면 청청한 하늘이다. 위험한 사상이라는 거야. 위험한 사상이에요. 선, 그냥 그러면 좋다. 이러면 안되요. 선은 반불교적인 성격이 강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여기 굉장한 함정이 있어요. 대승기신론, 세상에 복잡한 책. 되게 복잡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단하나 번역이 있으니까 참고해봐도 되는데, 오늘은 대승을 이해하고, 그 대승에서 이제 반야사상으로 이해가 되었잖아요. 반야사상 대표적인게 금강경, 앞으로 이것을 보겠는데, (금강경 - AD 150-200년 경 성립한 반야경전의 대표작)

 우리가 불교를 가지고 우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것을 이흥연간이라고 하는데 (이흥연간 - 신라 법흥왕(514-539), 진흥왕(539-575)의 재위 기간) 진흥왕 때, 신라 영역 최고로, 법흥왕 때 이차돈 순교가 있었죠. 그 때 걸리는 사람이 양나라 무제에요. (양무제(502-549 재위) 남조 양나라의 창시자. 중국불교의 중흥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의 아들 소명태자(501-531)가 금강경을 32분 텍스트로 만들었다.) 경전도 보내고 향도 보냈어요. 우리 옛날 이야기보면, 향 뭔지 몰라서 이거 어디에 쓰는 겁니까? 이 때 양무제는 사신을 시켜 의복, 향물, 불경, 불상을 보내왔다. 묵호자 알아요?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묵호자 - 신라에 불법을 전했다는 전설적인 인물.) 얼굴이 시커먼 오랑케라는 말이에요. 아마 인도사람인데, 드라비족. 인도 토종들이 시커메요. 북쪽은 하얀 사람도 많은데. 묵호자가 향 어디 쓰는 거냐? 법흥왕 물으니까, 부처님 불상에 피우고 빌면 소원이 성취됩니다. 그 때 마침 공주 아파서 빌었는데, 나았다.

 그런 전래 이야기 많죠. 해동유사니, 삼국유사니. 양무제 최초 일화 나오는게, 벽암론이란 말이죠 (벽암록 - 선종의 종문제일지서라고 불리는 공안 100칙의 모음집.) 그 첫 고사가 양무제와 달마의 일화이다.

 내가 이런 선의 이야기를 들어가기 위해서, 공안 유명한 것 하나만 소개할께요. 선의 역사. 헤능으로 부터 시작되어서, 가장 혜능으로 부터 마지막 꽃을 피운 사람이 조주라는 난 생각해. (조주(778-897) - 종심, 산동성 조주의 사람. 속성은 학씨. 선종의 대미를 장식한 대선사.) 300백년 동안 찬란한 선의 역사여. 당나라 때이지. 당나라 때 초당으로부터 만당까지, 당나라 쇠할 때까지 대가고. 벽암록 최고의 스타입니다. 벽암록 100개의 공안 중에서 12개가 조주의 공안이다. 벽암록 나오는데, 조주스님은 대단한 분이죠.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 조주스님이 처음 출가를 했는데, 원래 산동 사람이야. 남전이라는 (남전(748-834) 하남성 의 사람. 조주의 스승 안휘성 지양 남천산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하고 평상심의 종풍을 일으킴.) 선사에게 글로 내려가요. 가서 뵈었거든. 조그만 10몇살되는 사미승, 동승이 일찍 출가했으니까, 와서 남전스님이 당시 선방에서 겨울인데 따뜻하게 불을 떼고, 밖을 내다보면서, 뜨락을 보고 있는데, 꼬마동승이 멀리서 온 거죠. 와요. 와가지고, 기웃기웃 거린단 말이에요. 남전스님이 너 어디서 왔나? 서상원에서 왔습니다. 상서로운 모습이라는 의미가 있거든. 남전스님이 서산은 봤겠구나. 아름다움 모습은 봤겠구나. 그러니 그 꼬마가 서산을 못 봤습니다와는, 와불을 봤습니다. 남전을 자기는 보러 왔으니까, 서산은 본적은 없고, 와불은 봤습니다. 그러니까, 꼬맹이봐라. 이게 선의 세계에요. 일어나서, 의관의 정제하고, 탐이 난단 말이야. 재치가 있고, 이놈은 성공할 놈이다. 니놈은 주인이 있는 사미냐, 없는 사미냐? 데려다 기르고 싶은데. 이놈이 하는 이야기가. 저는 스승이 있습니다. 얼마나 실망이되. 남전이. 그러면 그 스승님은 어느 절에 있느냐? 그러니 이 놈이 넙죽 줄을 하면서, 옥체만강하옵소서.

 이런 게 선의 세계. 인간의 재치와 뭐랄까? 인간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막연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전은 조주의 혜망을 간파하고 입실을 허락한다. 조주스님 120세 살았어요. 역사적으로 정확하거든요. 당나라 문명의 최고의 스님이 되신 거죠. 그래가지고 이 양반이 이렇게 큰 절에 앉아계시는데, 아주 어린 스님이 조주스님은 말년 40년 동안 하북성 조주의 관음원에서 머물렀다.

 다음의 일화는 관음원에서 있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저 천길 만길을 마다하고, 중국이 오죽 커요? 천신만고 끝에 조주스님을 뵌 거에요. 뵈러. 드디어 엎드려서 조주스님에게 절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스님께 불법을 구하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촉립에 와서, 스님의 교수를 받고 싶으니, 불교의 지상에 더 없는 진리를 터득하고 싶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켜 주십시오. 얼마나 감격하겠어요. 긴장감이 도는 순간. 조주스님이 딱 절을 하고 일어나서 분위기를 잘 아셔야 되요. 스님은 긴장하고 있는데, 조주가 아침 먹었냐? 그 순간에 끝이에요. 이해가 가? 어려워? 그게 공안이에요. 그 순간에 이 스님이 대어를 합니다. 이해가 안가요?

 다시 한 번 딴 거 해줄게. 해설을 하면 안되요. 이게 선이에요. 대어를 한 동자승.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주스님 해인사 같은 곳, 같은 데, 방장같은 거 할 거 아니에요? 중국 수천명 들락거리는 대찰, 120세 넘은 노인이 산보를 하다가 어떤 스님이 온 거에요. 괜히 물어보시는 거에요. 너 여기 처음왔냐? 그러면 젊은 스님들이, 처음왔습니다. 와 본적이 없는데, 그러면 차 한잔들게. 그러신단 말이야. 그리고 나서는 다시다가 어떤 스님이 또 오면, 너 왔었냐? 어떤 스님은 저는 여기 여러 번 왔습니다. 그렇게 한 단 말이에요. 그래도 차 한잔 들어. 원주 스님이보고 궁금하단 말이야. 그렇게 했는데, 매일 물어보시더니, 처음 온 자에게도 차 한잔 들어, 여러번 왔던 사람에게도 차 한잔 들어하니까, 궁금해서, 왜 처음 온 사람에게도 차 한잔들어하고, 여러번 왔다는 놈에게도 차 한잔 들어하시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묻는 거에요. 조주스님이 원주를 꽤뚫어 보는 거야. 원주! 원주가 깜짝놀라서 멍하게 처다보고, 자기가 잘못한거 있냐하고. 온화한 말씀으로, 차 한잔 들어. 이해가 가요.

 이런 말이 인사동 건물에도 많이 쓰여있고, 개소리 되어 버렸는데, 잘 이해해 보세요. 선 궁극가면, 사미승 천신만고 끝에 불교의 지극한 도리, 깨닳고자. 그에게 아침 먹었냐? 니가 아침 먹을 때의 평상심이 부처님 마음이다. 그걸 깨닫지 않으면 입문할 수 없다는 거에요. 불성은 곧 평상심이다. 조주의 선에 오면 여래장론이 평상심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것이 간단한 이야기지만, 이건 굉장히 오묘한 거에요. 여러분 이거를 갖다가 우습게 알면 안되요. 몇 천년의 불교가 진행되어서 여기까지 오는 거에요. 처음 온 사람과 여러 번 온 사람에 대한 대접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원주스님의 분별심에 대하여, 조주는 "차 한 잔 들게"라는 언어 아닌 언어를 제시했다. 차 한잔 들게라는 것을 개념적으로 왜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하냐는 분별심 자체가 불성이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니 너도 차 한 잔 들어라. 해석을 해선 안되는 부분. 그 상황에서 대어를 해야하는 거에요. (공안은 이지적인 해설의 대상이 아니다. 삶의 구체적 느낌 속에서 깨달을 대만이 의미가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안 되는 거에요.

 그 당시 조주의 말이 불교가 이러한 여래장론으로 진행되면, 결국은 최후로 조주의 평삼심까지 오는게, 선의 세계이고, 직관의 세계이고 이것이 인간은 모두 불성을 구유하고 있다는 의식이 이런 평상심이 불성이다 가면 완벽한 인간의 평등주의가 오잖아요. 이게 불교의 종점이에요. (반야사상 - 알라야식론 - 여래장론 - 평상심 선은 철저한 인간평등주의 위에 서있다.) 깨달음의 가능성은 모든 인간에게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조주의 평상심이다. 불성 구유함으로 우리는 동일한 가능성의 존재라는 거에요. 동일한이 아니에요. 동일한 가능성. 이건 새로운 아트만이 아니라, 일심의 가능성, 거대한 우주적 에너지를 탯줄로 해서 태어난 존재.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다른 문제에요. 우리의 모든 마음은 우주에 편재해 있는 법신을 탯줄로 하여 태어났다는 것이 여래장론의 평등사상이다. 여래장론을 통해 제시한 것. 불교의 모든 이슈가 나오는 건데, 대승, 소승론에 있어서 이해해야 하는데, 대승운동 상당히 강력한 것이면서도, 소승의 입장에서는 반불교적, 비불교적인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깊게 알아야. 우리나라에 이런 반, 비불교적인게 통찰없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출처: Dohol@NeT






도올 김용옥(金容沃)

대한민국의 철학자, 사상가, 교수, 한의사...

 김용옥(金容沃, 1948년 6월 14일~ )은 호 도올(檮杌)로도 잘 알려져 있는 대한민국의 철학자, 사상가이다.

 대학교수를 지낸 학자이자 한의사이고, 극단의 단원으로도 활동하고, 연출가이고, 영화와 연극의 시나리오를 쓴 극작가이고, 언론에 기사와 칼럼을 써내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동,서양 철학과 종교사상까지 다양한 학문적 탐구와 저작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대중을 대상으로 강의한 TV 노자와 21세기 강좌에서의 상식을 깨는 인상적인 강의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철학은 동양과 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기철학을 중심으로 한다. 아직 그 전모에 대해서는 형성중이라고 여겨지지만 동양사상이 그 뿌리인 기철학을 통해 서양철학의 여러 문제를 해소하고 사상적,보편적 비전을 제시하는 의미를 가지리라 판단된다.


1953년 4월~1959년 3월 천안제3국민학교 졸업
1959년 4월~1965년 2월 보성중•고등학교 졸업 (55회)
1965년 3월~1967년 2월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생물학과
1967년 3월~1968년 2월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
1968년 3월~1972년 2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문학사, 「버트란드 럿셀의 논리원자주의」)
1972년 3월~1972년 8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대학원
1972년 9월~1974년 6월 대만 국립대만대학 철학연구소 (철학석사, 「노자 "자연" 철학에서의 "무위" 의 기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
1974년 9월~1975년 3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연구생
1975년 4월~1977년 2월 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 (철학석사,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
1977년 2월~1977년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
1977년 9월~1982년 6월 미국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철학박사, 「왕부지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chich(1616~1692)」)
1990년 3월~1996년 2월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 (한의학사)



저서:
《東洋學 어떻게 할 것인가》, 통나무, 1985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86
《루어투어 시앙쯔》(윗대목• 아랫대목), 통나무, 1986
《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강의》, 통나무, 1986
《어찌 묻힌단 말 있으리오》, 통나무, 1986
《아름다움과 추함》, 통나무, 1987
《절차탁마 대기만성》, 통나무, 1987
《이땅에서 살자꾸나》, 통나무, 1987
《새춘향뎐》, 통나무, 1987
《老子哲學 이것이다》(上), 통나무, 1989
《나는 佛敎를 이렇게 본다》, 통나무, 1989
《老子-길과 얻음》, 통나무, 1989
《도올 金容沃의 新韓國紀 》, 통나무, 1990
《白頭山神曲-氣哲學의 構造》, 통나무, 1990
《장군의 아들》, 통나무, 1990
《讀氣學說》, 통나무, 1990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 통나무, 1990
《도올세설》, 통나무, 1990
《대화》, 통나무, 1991
《도올논문집》, 통나무, 1991
《三國遺事引得》, 통나무, 1992
《氣哲學散調》, 통나무, 1992
《石濤畵論》, 통나무, 1992
《너와 나의 한의학》, 통나무, 1993
《醫山問答-기옹은 이렇게 말했다》, 통나무, 1994
《삼국통일과 한국통일》(上•下), 통나무, 1994
《天命•開闢》, 통나무, 1994
《檮杌先生 中庸講義》(上), 통나무, 1995
《건강하세요》(Ⅰ), 통나무, 1998
《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 통나무, 1998
《이성의 기능》, 통나무, 1998 (원저: The function of Reason, Alfred North Whitehead)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통나무, 1999
《노자와 21세기》(1•2•3), 통나무, 1999(1권), 2000(2•3권)
《도올 논어》(1•2•3), 통나무, 2000(1권), 2001(2•3권)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1•2•3), 통나무, 2002
《도올의 淸溪川 이야기》, 통나무, 2003
《혜강 최한기와 유교》, 통나무, 2004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
《도올심득 東經大全》(1), 통나무, 2004
《도올의 국가비젼》, 통나무, 2004
《앙코르와트•월남가다》(上•下), 통나무, 2005
《논술과 철학 강의》(1•2), 통나무, 2006
《요한복음강해》, 통나무, 2007
《기독교성서의 이해》, 통나무, 2007
《큐복음서》, 통나무, 2008
《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1), 통나무, 2008
《논어한글역주》(1•2•3), 통나무, 2008
《21세기 한의학을 위하여》의 제2강, 경희대학교 출판국, 2009
《효경한글역주》, 통나무, 2009
《대학•학기 한글역주》, 통나무, 2009
《계림수필》, 통나무, 2009
《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1•2•3), 통나무, 2010



TV 강의
1999년 11월~2000년 2월 《노자와 21세기》(56회), EBS
2000년 10월~2001년 5월 《도올의 논어 이야기》(64회), KBS
2002년 8월~2002년 11월 《도올, 인도를 만나다》(28회), EBS
2004년 1월~2004년 6월 《도올 한국사상사특강, 우리는 누구인가》(26회), MBC
2006년 1월~2006년 5월 《도올특강 역사를 말한다》(6회), 광주MBC
2006년 2월~2006년 8월 《논술세대를 위한 철학교실》(50회), EBS
2009년 11월, 《도올특강 논어이야기》, 광주MBC


모든 정보의 출처: 위키 백과사전



도올 김용옥(金容沃)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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