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반드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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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상(上)》

조계사 인근 다방 레지도 엽차 내놓으며 읊조렸다
산은 산, 물은 물이지요





 25세 이영주가 머리 깎고 불교와 만난 곳, 해인사 퇴설당 들어서자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걷거나 머물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 항상 화두를 염두에 두라 스님의 죽비가 잔설이 되어 내리치고 있었다

 다음 달 11일은 퇴옹(退翁) 성철(性徹•1912∼93) 스님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스님은 20세 한국 불교의 아이콘이었다. 치열한 수행, 소탈한 생활로 불교계는 물론 뭇 대중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큰 어른이었다. 스님의 탄생 100년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도 잇따를 예정이다. 성철 스님은 지금 우리에게 무슨 말을 던지고 있을까. 그 뜻을 가늠하기 위해 스님의 주요 행적지 세 곳을 찾아간다.

 지난 8일 오전 8시50분. 경남 합천 해인사 일주문에 도착했다. 젊은 스님 일덕(日德)이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 일주문 양쪽 기둥의 주련(柱聯•기둥에 세로로 써 내린 글귀)이 눈길을 붙든다. ‘천겁의 긴 세월이 지나도 옛 되지 않고, 만세를 뻗쳐 항상 지금이다’. 영원히 변치 않을 불법, 끝내 사람들에게 기억될 성철의 구도 정신을 상징하는 듯했다.

 9시30분 해인사 방장 시절 스님의 거처였던 퇴설당(堆雪堂)에 들었다. ‘사시좌선(四時坐禪)’. 오래된 편액(扁額)이 마당으로 통하는 문 위에 걸려 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 걷거나 머무르거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항상 화두를 염두에 두라고 했던 스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살아서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존경받았고, 죽어서는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큰스님 반열에 오른 성철(속명 이영주) 스님. 갈수록 승려가 왜소해지고 산중의 청정 도량마저 혼탁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요즘, 생전 스님이 보여줬던 품은 여전히 넉넉하고 깊다. 종교•승속(僧俗)을 떠나 수행생활의 귀감이 됐던 스님의 치열했던 정진 이야기는 아직도 흥미진진하다. 






 대표적인 게 8년 장좌불와(長坐不臥),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이다. 8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자며 참선하고, 무려 10년 동안 절 문밖 발길을 끊고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는 ‘전설적인’ 얘기다. 스님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혹한 계율(戒律)을 스스로에게 부과한 뒤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1993년 스님의 열반은 그 자신을 ‘살아 있는 부처’로 봉인하는 일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그해 11월 10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치러진 스님의 다비식에는 30만 명이 몰린 것으로 전해진다. 70년대 초반부터 스님을 모신 원택(圓澤) 스님은 “해인사 밖 30리부터 길이 막혔다”고 회고한다.

 해인사를 찾은 건 이 절과 부속 암자인 백련암이 스님의 출가 도량이자 열반 도량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25세의 나이에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고, 정확히 57년 뒤 열반에 들었다. 해인사와 백련암은 자연인 이영주(李英柱)가 불교와 운명적으로 만난, 시작과 끝이다.

 퇴설당 마당에는 전날 내린 잔설이 쌓여 있었다. 말 그대로 눈 쌓인 집이다. 바로 옆에 법보종찰(法寶宗刹)이라는 해인사의 별칭이 유래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판전이 있다.

 스님은 “맑은 기운이 흘러나온다”며 판전 주변을 즐겨 걸었다고 한다. 원택 스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열반에 든 곳도 퇴설당이다. ‘일생 동안 사람들을 속인 죄 수미산을 지나친다’는 내용의 열반송도 여기서 공개됐다.

 스님은 81년 1월 해인사에서 조계종 7대 종정에 추대됐다. 당시 밝힌 종정 수락 법어(法語)는 그를 일약 ‘전국구 스타’로 만들었다. 법어는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라는 알쏭달쏭한 글귀로 시작해 회심의 구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로 끝난다.

 대중은 맹물 같은 ‘산은 산, 물은 물’에 열광했다. 당시 스님들이 서울 조계사 근처 다방을 찾으면 레지(여종업원)들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에요”라며 보리차를 가져다 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60년대 중반 스님과 인연을 맺은 목정배 동국대 명예교수의 증언이다.

 퇴설당을 뒤로하고 백련암으로 향했다. 점심 무렵 암자에 도착했다. 과거에는 해인사에서 산길로 30분 거리였지만 지금은 암자 턱밑까지 포장이 돼 있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가 끝나자 스님들이 대부분 만행(萬行)을 떠나서다. 대신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기도를 하러 온 신자 몇몇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신자 가운데 서울에서 패션 관련 일을 하는 윤희진(38)씨가 있었다. 그는 일주일 휴가를 받아 백련암에서 매일 3000배를 올리고 있었다. “게으름 피우면 새벽 3시에 시작한 3000배가 오후 8시에 끝난다”고 했다.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일까. 윤씨는 “나만을 위해 기도할 때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이 있었는데 백련암에서 주변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이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윤씨는 인터넷 카페 ‘3000배’의 회원이다. 성철 스님의 정신을 기리며 백련암을 찾아 기도하는 모임이다. 백련암 일덕 스님은 “‘3000배’ 같은 인터넷 모임이 3개 더 있다. 덕분에 주말마다 60∼80명의 신자가 북적거린다”고 했다.

 스님은 퇴옹이라는 법호(法號)에 걸맞게 평생 뒷전에 물러나 불교계의 시빗거리와 담을 쌓고 살았다. 간간이 세상을 향해 매서운 죽비를 내리쳤을 뿐이다. 이런 스님의 행적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우침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위한다는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일까. 평일 오후 백련암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불자들을 보며 빈부•이념에 따라 갈기갈기 갈라진 우리 사회를 꿰매는 실마리를 보는 듯했다.



 “우리는 본래의 평화의 꽃이 만발한 크나큰 낙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비선악의 양쪽을 버립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원한 휴전을 하고 절대적 평화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 성철 스님의 법어 ‘중도(中道)가 부처님’에서


내달 성철 스님 특별전 열려
수행 24곳 순례 프로그램도


 성철 스님 의 수행 도량 24곳을 둘러보는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조계종 불교인재원(이사장 엄상호)과 백련불교문화재단(이사장 원택 스님)이 함께 준비했다. 다음 달 31일 스님이 태어난 경남 산청군 생가 터 옆에 건립된 겁외사부터 2014년 8월 마지막 방문지인 해인사까지 매달 한 차례씩 순례할 예정이다. ‘100주년 다례제’ ‘성철 스님 특별전’ 등도 다음 달 열린다. 순례 문의 1661-1108.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 《중(中)》

"밥값 내놓아라" 봉암사 큰스님, 뺨 후려치며 소동



 성철(性徹•1912∼93) 스님의 행장(行狀•한 사람의 평생을 요약한 글)에서 봉암사(鳳巖寺)를 빼놓을 수 없다. 스님이 열반에 든 지 20년이 돼가는데도 ‘그의 신화’가 아직 생생한 것은 ‘봉암사 결사(結社)’의 영향이 크다. 그만큼 봉암사에서 일어났던 불교개혁 운동이 현재 조계종단에 끼친 영향은 넓고 깊다.

 8일 오전 9시 서울을 출발했다. 성철 스님의 상좌(上佐•제자)인 원택(圓澤) 스님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해발 998m 높이의 희양산(曦陽山) 자락에 자리 잡은 봉암사에 이르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IC를 빠져나가 지방도를 여러 차례 갈아타며 20㎞ 길을 더 달려야 했다. 길 양편의 산세가 험해진다는 느낌이 들 무렵 원택 스님이 입을 열었다. “옛날부터 지세가 험해 큰 도적 아니면 도인이 나온다고 했던 곳입니다.”

 “1947년 성철 스님이 결사의 근거지로 봉암사를 선택한 것도 당시 대부분의 절이 대처승 차지였지만 이곳 봉암사만은 워낙 오지여서 무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봉암사 결사는 그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3년을 채우지 못하고 50년 봄 깨지고 만다. 한국전쟁 발발 전인데도 빨치산이 들끓어 스님들이 차분하게 수행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신변의 위협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한 해 딱 하루 열리는 산문 … 거기 선이 있다

 오전 11시30분. 차량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절은 숲에 가려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데 차량 통행 차단기를 갖춘 경비실이 길을 가로막는다. 사나워 보이는 몇 마리 경비견이 귀를 쫑긋 세운다.

 봉암사는 조계종의 몇 안 되는 폐쇄(閉鎖) 산문(山門) 중 하나다. 부처님 오신 날을 빼고는 1년 내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다. 최고의 참선 수행 환경을 위해서다. 82년 종립 특별선원(禪院)으로 지정되면서 절 문을 닫았다.



성철 스님(오른쪽)은 열 살 많은 청담 스님과 친구처럼 지냈다.
봉암사 결사를 추진한 동지이기도 했다.
청담의 딸 묘엄 스님을 출가시킨 이도 성철이다.
성철 스님은 번잡한 서울 나들이를 극히 꺼렸다.
1965년 북한산 비봉 부근에서 함께한 성철•청담 스님. [중앙포토]

 경비실을 통과하자 곧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 뒤로 세속과 선경(仙境)을 가른다는 석문(石門)이 버티고 있다. 높이 4∼5m 돼 보이는 자연 석벽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길 양편 석벽을 석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희양산•구왕봉(887m) 등 ‘은산철벽(銀山鐵壁)’ 봉우리들에 둘러싸인 절은 한눈에도 아늑하다.

 사찰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 해제 뒤끝이기 때문이다. 몇 남지 않은 선승들은 그나마 인근 산자락으로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포행(布行•천천히 걸으며 참선하는 것) 나갔다고 한다.

 소박한 점심 공양을 마치자 주지인 원타(圓陀) 스님이 일행을 반갑게 맞는다. 스님은 “봉암사는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건립됐다”고 소개했다. 뿌리 깊은 선찰(禪刹)이다. 국보 315호인 지증대사적조탑비, 보물 169호인 삼층석탑 등 문화재가 즐비하다. 성철은 오래된 석탑 주변을 거닐며 ‘진리의 길’을 찾고 또 찾았을 것이다. 대웅보전 옆에 스님이 사용했다는 자그마한 극락전이 덩그렇게 놓여 있다.

 봉암사 결사는 제도 개혁이 아닌 참선 수행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불교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이었다.

 “부처님 법이나 조사(祖師•한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 스님 법에 틀렸으면 지적해서 고치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하고 실천하자. 곧 내일모레 굶어 죽는 한이 있다 해도 (부처님) 법대로, 법 가깝게 우리 한번 살아보자”는 원(願)을 세웠다(성철 스님의 84년 월간 ‘해인’ 기고문 중에서).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참선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스님들은 밥 해주는 공양주, 땔나무 마련하는 부목(負木) 처사부터 내보냈다. 그리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이라는 불교 전통의 청규(淸規) 정신에 따라 손수 먹거리를 구했다.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 앞에서 스스로 죄를 자백하는 포살(布薩), 현재의 괴색(壞色•검붉은 자목련색) 승복, 신도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예법 등이 이때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성철 스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스님들의 분심(憤心)을 자극해 오로지 참선에만 매진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종정(宗正)인 법전(法傳) 스님의 회상기(『가야산 호랑이를 만나다』)를 보면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가 생생하다. 글에 따르면 성철 스님은 동료•제자 스님들의 참선 집중도가 떨어진다 싶으면 “밥값 내놓아라!”라고 쩌렁쩌렁 고함 치며 한바탕 소동을 벌이곤 했다. 뺨을 후려치는 건 기본, 한겨울에 물벼락을 맞거나 성철 스님이 던진 놋쇠 향로를 머리에 뒤집어 쓴 스님도 있다. 훗날 해인사를 호령했던 ‘가야산 호랑이’라는 괄괄한 성정이 이때 벌써 싹을 보인 것이다.

 그런 다그침 때문이었을까. 결사에 참가했던 20여 명의 스님 중에서 조계종 종정이 네 명(성철•청담•혜암•법전), 총무원장이 여섯 명(청담•월산•자운•성수•지관•법전)이나 나왔다. 일제강점기 사그라지던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이 기운차게 되살아난 셈이다.

 현재 봉암사 태고선원(太古禪院)은 전국의 선방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안거철이면 80∼100명의 선승이 함께 수행 정진한다. 주지 스님도 형식적으로 추천받을 뿐 자체적으로 뽑는다. 그만큼 자율성이 인정된다. 원타 스님은 “60여 년 전 결사의 전통이 살아 있는 수행의 중심 도량이라는 자부심이 선승들 사이에 강하다”고 했다.

 선승들은 지난 동안거 기간에도 산골짜기 봉암사에서 뭇 중생들을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도를 밤낮 올렸을 것이다. 절 문을 나서는 순간, 성철 스님의 호탕한 일갈이 들리는 듯했다.

 “좋으나 궂으나, 자기이익을 완전히 떠나서 바로 믿고 살자 이것입니다. 좀 손해를 본다 싶어도 그것이 바른 길이면, 아무 의심 없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바른 길로 걸어가 봅시다.”(월간 ‘해인’ 기고문)




조계종 자체 개혁 운동 … 종정 4명 총무원장 6명 배출

 ◆봉암사 결사=1947년 10월부터 50년 3월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경북 문경 희양산 자락의 봉암사(鳳巖寺)에서 행해진 조계종 승려들의 불교개혁 운동이다. 결사(結社)는 불교계 정화와 혁신을 위한 운동을 뜻한다. 처음에는 성철(性徹) 스님을 비롯, 청담(靑潭)•자운(慈雲)•우봉(愚峰) 스님 등 네 명이 시작했으나 향곡(香谷)•월산(月山)•종수(宗秀)•도우(道雨)•성수(性壽) 스님과 현 조계종 종정(宗正)인 법전(法傳) 스님, 묘엄(妙嚴) 등 비구니 스님까지 가세해 식구가 20여 명까지 늘었다. 결사의 목표는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것이었다. 일제의 영향, 토착 기복신앙 등으로 혼탁해진 불교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올곧게 참선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땅에 떨어진 승풍(僧風)을 회복한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결사 참가 스님 중 조계종 종정이 네 명, 총무원장이 여섯 명 나왔다.




성철(1912~93) 탄생 100년, 그 자취를 찾아《하(下)》


산골 용맹정진 10년 … ‘스스로 만든 감옥’서 깨달음을 얻다



 성전암(聖殿庵)은 대구 팔공산 중턱 700m 고지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다. 본사(本寺)인 파계사(把溪寺)에서 가파른 산길을 20여 분 걸어 올라가야 닿는다. 이 암자가 선승들 사이에 수행 도량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데는 성철(性徹) 스님의 공이 크다.

 스님은 속가(俗家) 나이로 40대 중반이던 1955년 처음 이곳을 찾았다. 50대 초반이던 63년까지 8년 남짓 ‘동구불출(洞口不出)’, 즉 절문 밖을 나가지 않고 불교 공부에 몰두했다. 경남 통영의 안정사에 딸린 천제굴(闡提窟) 시절까지 합치면 그 세월은 10년에 이른다. 속세의 안목으로 보자면 사내로서 가장 원기 왕성한 10년을 좁디 좁은 암자에서 진리에 이르는 길에 오롯이 바친 것이다.




 지난 8일 오후 성철 스님의 상좌(上佐•제자)인 원택(圓澤) 스님과 함께 성전암에 올랐다. 칠순이 가까운 원택 스님은 힘이 부치는 듯했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땀이 날 만큼 오르막이 가팔랐다. 암자에 오르니 멀리 대구 시내가 어렴풋이 보였다. 전기가 귀하던 60년 전 암자에 들면 주위는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을 것이다. 성철 스님은 부산 서면 시장통에서 구해온 철조망을 암자 주위에 둘렀다.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철조망 안쪽에 자물쇠를 채워 스스로를 가두고는 “갇힌 것은 반대쪽”, 즉 세상이라고 선승(禪僧)다운 한마디를 던졌다고 한다.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동안거 해제철이기 때문이다. 눈매가 날카로운 스님 하나가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법명(法名)을 밝히기를 거부한 그는 “기도하기 좋은 곳을 찾아 다닌다”고 했다.



성전암 전경. 대구 팔공산의 가파른 산비탈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멀리 대구 시내가 보인다. 
성철은 불교가 서양의 학문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현대적인 종교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8년간 암자 바깥 출입을 금한 채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했다. [안성식 기자]

 성전암은 단순히 마음을 가둔 감옥이 아니었다. 애끊는 사연이 있다. 불자(佛者)로서 성철은 대오각성(大悟覺醒), 다시 말해 해탈에 이른 대자유인이었는지 몰라도 자연인 이영주(李英柱•성철의 속명)의 가정사는 기구했다. 성전암은 그 현장이다. 

 성철의 출가로 그의 집안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난다. 완고한 유학자였던 아버지 이상언(李尙彦)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의 딸도 훗날 출가해 불필(不必)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졸지에 남편과 딸을 불교에 빼앗긴 부인 남산댁은 딸만은 돌려달라고 사정하기 위해 성전암을 찾았다가 호되게 내쳐진다. “빨리 저거 쫓아내라”는 성철 스님의 호령에 시자(侍者) 스님들이 남산댁을 산 아래까지 강제로 끌고 내려간 것이다.

 일반인의 균형감각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아무리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절실했다 하더라도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힌 8년 동안 성철 스님은 과연 무슨 공부를 한걸까.

 부산 해월정사(海月精舍)의 천제(闡提) 스님은 성철 스님의 맏상좌다. 성전암 시절 고스란히 성철 스님을 모신 그는 “(성철 스님이) 불교 공부에 새롭게 정진했다기보다 그간 공부한 내용을 현대적인 학문을 동원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하신 기간”이라고 말했다. “불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가 아니라 얼마든지 현대의 서구 학문에 들어맞을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구해 읽었다”는 것이다.

 이때 성철 스님이 섭렵한 목록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 물리학 서적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서적은 물론 시사잡지 타임•라이프 등도 포함된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어(梵語)을 알아야 한다며 제자인 천제 스님에게 이를 공부하도록 한 것도 이 시기다. 제자 스님들은 스님의 성화에 못 이겨 사서삼경도 외워야 했다.

 ‘동구불출 10년’은 67년 해인사에서의 백일법문, 그보다 앞선 65년 경북 문경 김용사(金龍寺)에서의 첫 대중법회 등 기존 불교 법회와는 차원이 다른 성철 특유의 설법으로 이어진다. 불교의 핵심 교리를 담은 『반야심경』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상대성 이론을 통해 설명하는 새로움과 해박함에 모두 혀를 내둘렀고 그만큼 불교계에 미친 파장이 컸다는 것이다.

 일반인에게도 통하는 알기 쉬운 설명은 물론 깊은 공부의 소산이다. 『본지풍광(本地風光)』은 생전 성철 스님이 “이 책으로 부처님께 내 밥값을 했다”며 자랑스러워 한 책이다. 불교의 유명한 공안(公案•화두)을 모은 후 그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각종 문헌 자료를 제시한 책이다.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김영욱 책임연구원은 “요즘처럼 DB 자료나 인터넷 검색도 할 수 없던 시절에 방대한 자료를 정확하게 인용했을 뿐 아니라 공안에 대한 안목과 이해에 관한 한 선사(禪師) 특유의 전광석화 같은 기운이 곳곳에 보인다”고 평가했다. 성철 스님은 웬만한 불교학자도 갖추기 어려운 안목의 소유자였다는 것이다.

 성전암의 한 구석에는 ‘적묵실(寂默室)’이란 현판이 걸린 작은 건물이 있다. 성철 스님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 건물에는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 불향여래행처행(不向如來行處行)’이라는 주련(柱聯•기둥에 세로로 써 내린 글귀)이 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부처가 가는 길은 가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부처마저도 부정하고 자신의 갈 길을 가고야 말겠다는 각오가 담긴 기개 넘치는 문구다. 인륜(人倫)의 장애쯤 거뜬히 넘어버리고 스스로 자유로워져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큰 뜻이 성전암에는 서려 있었다.




출처: 중앙일보 - 조인스 (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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