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간 ‘설산고행’ 닮은 두타행… 티끌-정토가 모두 한 암자려니…
원감국사는 고종13년(1226) 전남 장흥에서 탄생했다. 속명은 위원개(魏元凱), 법명은 밀암(宓庵), 법휘는 법환(法桓), 법호는 충지(沖止),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국사는 유년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9세에 취학(就學)하여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에 예부시(禮部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또한 국사는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가서 수려한 문체로 일본인을 놀라게 하였다.
국사는 29세에 불문에 출가했는데, 그 동기는 전쟁과 민란 그리고 질병 등으로 민중들의 고귀한 생명이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시대적 혼돈 속에서 겪었던 생에 대한 고뇌였다.
국사는 승려가 된 후 41세가 될 때까지는 두타(頭陀)의 행각(行脚)을 하였으며, 삶도 죽음도 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 정진을 거듭했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홀로 선정에 들매, 그 모습이 마치 허수아비 같았고,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새발자국이 무릎에 찍힐 정도였다.
국사는 41세에 정진을 중단하고 김해 감로사에 주석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덕(禪德)이 찾아왔다. 그 선덕이 국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입니까?”
이에 국사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천지를 꿰뚫는 무애(無碍)의 소리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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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悟道頌)으로 보는 한국禪】 무산스님 - 원감국사의 無碍(무애)
無碍(무애)
春日花開桂苑中
(춘일화개계원중)
暗香不動小林風
(암향부동소림풍)
今朝果熟沾甘露
(금조과숙첨감로)
無限人天一味同
(무한인천일미동)
봄날 꽃은 계원(桂苑)중에 피었는데,
암향(暗香)은 소림의 바람에 움직이질 않는구나.
오늘 아침 익은 과일은 감로에 젖었고,
한없는 인천(人天)은 한 가지 맛이구나.
그 후 국사는 감로사를 떠나서 정혜사(定慧寺)에 주석한다. 45세 되는 봄에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聽泉(청천)
鷄足峯前古道場
(계족봉전고도장)
今來山翠別生光
(금래산취별생광)
廣長自有淸溪舌
(광장자유청계설)
何必喃喃更擧揚
(하필남남경거양)
계족산 봉우리 앞 옛 도량,
이제와 보니 푸른 산 빛 유별나네.
부처님 소리 바로 맑은 시냇물 소리인데,
무엇 때문에 귀찮게 다시 부처님 소리 세우리.
국사께서는 부처님의 법이 자연 자체인 것을, 또한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마는 국사의 수행은 끝이 없었다.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무릎에 먼지가 쌓여 새 발자국이 찍히며 머리카락은 억새풀처럼 변하여 허수아비처럼 되는 선정에 들고는 하였다. 이렇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정에 들어있던 어느 날 천지각(天地覺)을 하였다.
天地一香 (천지일향)
塵刹都盧在一庵
(진찰도노재일암)
不離方丈遍詢南
(불리방장편순남)
善財何用勤劬甚
(선재하용근구심)
百十城中枉歷參
(백십성중왕력참)
티끌과 정토(淨土)가 모두 한 암자,
방장실을 떠나지 않고도 남방을 두루 순방했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심한 고생을 자처하여,
백십성(百十城: 수를 셀 수 없는 여러 곳)을 순력(巡歷: 돌아다닌다)했는가.
달빛도 국사의 깨침 앞에 빛을 잃어버렸다. 천지를 넘어선 국사의 고선풍(高禪風)은 중생세계에 참사람이 되는 길을 인도해 놓고 충렬왕 19년(1293)에 몸을 접었다.
· 무산 스님은...
무산 스님(撫山 스님, 경주 해회선원 회주)은 1943년 경주에서 태어나 13세에 지리산 백운암 법장스님에게 출가했다.
춘성ㆍ화엄ㆍ효당 스님에게 선과 다도를 수학한 스님은, 한국다선학회와 천연염색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역대고승의 다시>, <천연염색법 개론> 등 10여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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